[커버 스토리] 벤치마킹은 늦다 '가물치 전법' 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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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선진기업을 모델로 삼아 경영기법을 배우는 벤치마킹 대신 처음부터 독자적인 1등 전략을 쓰는 기업이 늘고 있다.

벤처성 e-비즈니스가 각광받는 디지털 시대에 다른 기업한테 배워 따라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 벤치마킹 과정에서 전략과 정보가 유출돼 기존 입지마저 잃거나 거꾸로 흡수.합병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현재 기업이 갖고 있는 장점을 우선적으로 내세워 업계를 제패하자는 이른바 '가물치 전략' 을 쓰는 기업이 생기고 있다.

가물치 전략이란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지 않은 채 뛰어난 두뇌를 이용해 경쟁자인 뱀을 잡아먹는 것을 기업경영 전략에 빗댄 말.

가물치(국내 기업)가 뱀(해외 선진기업)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정보와 아이디어를 유출하기 쉬워 되레 잡혀 먹힐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의미다.

송병락 서울대 교수는 "외국업체를 벤치마킹하다 약점만 노출돼 오히려 그 업체에 시장을 빼앗길 수도 있다" 며 "국내 업계도 세계시장 점유율 1위 제품을 만드는 등 어느 정도 자체 경쟁력을 확보했으므로 자신감을 갖고 독자적으로 세계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고 말했다.

한솔그룹은 1995년부터 다국적기업인 노키아를 벤치마킹했다. 제지업으로 출발해 정보통신 분야로 진출해 성공했기 때문에 노키아를 경영모델로 삼았다.

그런데 99년부터 '한솔 Way' 를 선언하면서 독자적인 경영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한솔 경영기획실의 최재후 상무는 "우리 나름대로 갖고 있는 장점을 살려 경쟁력의 원천으로 삼기로 했다" 며 "다른 데서 배워봤자 잘해야 2등이 될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두산그룹도 계열사.부서별로 해왔던 해외 벤치마킹을 접고 전문 컨설팅 업체인 매킨지를 통해 독자적인 경영조언을 받고 있다.

두산 관계자는 "2~3년 전만 해도 선진 외국기업의 모델을 많이 연구했는데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워 컨설팅 업체를 통한 경영자문 방식으로 바꿨다" 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신기술과 새로운 경영기법이 속출하고 있어 벤치마킹하는 데 걸리는 몇달 동안 앞서는 기술과 경영기법이라고 자부할 만한 기업을 찾기 힘들다.

또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이 요구되는 '스피드 경영' 시대에 다른 기업을 뒤쫓아 배우다간 앞서가기는커녕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외환위기 직전부터 독자적인 과감한 투자로 반도체와 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코드분할(CDMA)휴대폰 등 3개 품목을 세계 시장 1위로 끌어올렸다.

삼성전자는 이 자신감을 바탕으로 디지털TV와 컴퓨터 프린터를 2005년까지 세계 1위로 도약시킨다는 이른바 '세계 초일류 전략' 을 쓰고 있다.

정몽구 현대 회장도 올초 초일류 경영을 선언했다. LG.SK 등도 계열사별로 3~6개 해외 경쟁업체를 벤치마킹해오다가 그만두었다.

기업들은 연초부터 벤처.인터넷 사업에 역점을 두면서 인력.재무.관리분야에서 기민하게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송병락 교수는 "자기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인정받는 월드 클라스 기업이 국내에서도 속속 나오는데다 인터넷 등을 통해 다양한 경영정보를 얻을 수 있으므로 선진 외국기업에의 벤치마킹 의존도를 줄일 필요가 있다" 고 지적했다.

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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