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17일 타계한 신태선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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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인생이란 유한(有限)을 자각함으로써 무한(無限)을 희구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유한을 깨닫는다면 유한적인 가운데 무한적인 생의 가치가 남는다. 이런 '유한' 의 의미를 간직하고 삶을 영위했던 인사들의 그 흔적을 되새겨본다.

연세대 의대 해부학 교실의 신태선(申泰善)교수가 그의 시신을 자신이 40여년 일해 온 연구실에 남기고 17일 이승을 떠났다.

그가 언제부터 이런 결심을 했는지는 그의 마음속 깊은 곳만이 알 것이다.

申교수도 부인 윤정배(尹貞培)씨 등 가족들에게 '특별한 의미의 언급' 은 없었고, 다만 "내 젊음과 열정을 바친 해부학의 후진들을 위해 시신을 기증했으면 좋겠다" 고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이 발발했던 1950년 그가 삶에 대해 발상의 전환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 22세로 의대 4학년이었던 그는 군의관으로 입대, 야전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이 해 12월 어느 날 서울 시내에서 귀가중 유탄을 복부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수도육군병원에서 동문 선배인 주정빈 소령의 집도로 대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그는 이후 틈 날 때마다 "남은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 이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 때문에 이번 시신 기증도 이같은 차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이해된다.

유명 인사들의 시신 기증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해부학 교수가 시신을 기증, 실제로 사용되는 것은 申교수의 경우가 처음이다.

제자 이원택(李元澤.44)교수는 "선생님의 결단은 후학들에게 생명의 귀중함과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될 것" 이라며 "학문의 길에 그가 기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친 셈" 이라고 말했다.

그의 시신은 오는 2001년 1학기부터 의대생들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제공되며 골격은 뼈대형태로 만들어 해부학교실에 영구 보존된다.

6년간의 군의관 생활을 끝내고 56년 학교로 돌아온 申교수는 해부학(조직학)공부에 몰두했다. 92년 정년 때까지 37년동안 모두 11권의 저서와 94편의 논문을 남겼다.

특히 63~65년 미국 예일대에 유학한 뒤 국내에 효소조직화학과 세포유전학을 처음 도입, 국내 기초의학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 당시로서는 드문 세미나식 수업과 구두시험을 자주 치루는 등 신 교육법도 도입했다.

암기식보다 전체 줄거리를 강조하는 申교수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李교수는 "선생님은 조교나 학생들에게 각자 과제를 내줘 수업시간에 발표하게 해 마치 연기지도를 하는 프로듀서같다고 해서 '신프로덕션' 이라고 불렸다" 고 회고했다.

申교수의 대학 동기인 신정순(申廷淳.72)전 연대의대 병원장은 "당시 남다른 결심이 없었다면 해부학을 선택하지 못했을 것" 이라며 "평생을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성실하게 연구에 정진한, 학자다운 학자" 라고 말했다.

장남 신재희(申在熹.44)현대상선 이사는 "집에서는 엄한 편이셨지만 클래식 음악과 추리소설 읽기를 즐기는 감상적인 면도 있었다" 며 "주변 사람에게 무언가 주시는 것을 좋아했다" 고 기억했다.

이형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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