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익-영창 합병 무산…정부가 '피아노 사양길' 재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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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적인 관현악단이 나올 수 없는 풍토다'.

무슨 근거에서 나온 말이냐고 발끈하는 이가 많겠지만 실제로 국내 악기업계에선 오래전부터 나돈 말이다. 피아노와 기타 두 품목만 세계적이고 나머지는 몽땅 수입에 의존하다시피 하는 우리나라 악기산업의 극심한 불균형 구조를 꼬집은 것이다. 그나마 '메이드인 코리아'악기의 대명사인 피아노도 사양길을 걷고 있는 가운데 업계.당국 간 불협화음으로 회생을 위한 구조조정은 지체되고 있다.

◆ 저무는 피아노 산업=우리나라 피아노 업계는 1990년 전후만 해도 전성기를 구가했었다.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88년에는 사상 최대 수출실적(13만4000대)을 올렸다. 이 무렵 삼익이 1억달러 수출탑을 받았고, 피아노는 오늘날 반도체나 자동차처럼 10대 전략 수출품목의 하나로 떠오르기까지 했다.

또 웬만한 국내 중산층의 필수 가구품목으로 인식됐다. 분당 등 수도권 신도시 입주가 한창인 91년 내수판매(18만7000대)가 사상 최대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주문이 넘쳐 새 승용차를 구매할 때처럼 피아노 배달을 기다려야 했던 게 당시 풍속도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피아노 생산국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외환위기와 소비패턴의 변화, 중국의 추격에 이르기까지 여러 변화가 피아노 산업을 옥죄었다. 피아노는 더 이상 가구 취급을 받지 않았고, 어린이들은 쉽고 재미있는 게임을 즐기려 PC 앞에 앉기 시작했다.

삼익은 96년 부도를 내고, 영창은 98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창립 반세기가 가까운 두 회사 모두 이 때문에 주인이 바뀌었다. 다만 삼익은 신속한 제3자 인수 등을 통해 재무구조 개선이 상대적으로 더 진전됐다.

지난해 내수 판매는 2만7000대, 수출은 1만대로 쪼그라들었다. 90년대 초반 각각 5000명에 달했던 양사 종업원 수는 오늘날 300명 안팎에 불과하다. 대부분 생산시설은 중국.동남아로 옮겨갔다.

◆ 업계 구조조정 시급=한국악기공업협회 진석규 전무는 "피아노 생산의 종주국이 유럽에서 미국.일본.한국을 거쳐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랜드.디지털피아노 등 고부가가치화에 힘써 브랜드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노력할 때"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삼익.영창악기가 합치면 한국 피아노 산업을 되살리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삼익악기 김종섭 회장은 "삼익과 영창은 특기가 다르고 생산기지도 상호 보완적이어서 경쟁력이 커진다"고 말했다. 삼익은 수출에, 영창은 내수에 주력해 와 두 브랜드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둔 삼익과 중국에 공장을 둔 영창이 합칠 경우 '피아노를 필수 가구로 인식하기 시작한' 중국의 중산층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다는 이점도 거론했다.

공정위는 그러나 독점 폐해를 지적하며 삼익악기에 영창악기 보유지분(48.6%)을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다. 악기 제조.무역회사인 KPBO상사의 이창선 사장은 "세계 속의 '문화 한국'이미지를 심어온 삼익.영창 브랜드를 존속시키기 위해 업계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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