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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 정보사회, 욕망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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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최근 논란을 이룬 ‘루저(loser) 사건’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널리 알려졌지만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지난주 모 방송 예능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온 한 여대생이 키가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하자, 인터넷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여학생에 대한 개인 신상의 폭로는 물론 ‘마녀사냥’을 방불케 하는 비난이 이어졌다. 급기야 프로그램 제작진이 교체되고, 몇몇 남성은 정신적 피해를 봤다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조정신청까지 냈다.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다. 먼저, 여학생의 발언은 적절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본에 적혀 있었더라도 타자를 배려하지 못한 발언은 성인으로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었다. 더불어, 제작진 역시 사려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리 편집할 수 있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막과 함께 방영한 것은 아무리 시청률 경쟁이 치열하더라도 분명 ‘오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인터넷 공간의 소비 양식이다. 여기에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문제적 발언이나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개인의 거의 모든 신상이 실시간으로 조사되고 공개된다. 과거 발언이나 행동은 현재 사건에 맞춰 재해석되고 성토된다. 개인에 대한 십자포화는 자연스레 사이버 공간의 마녀사냥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진다. 한쪽에선 집단적 비난의 정당성이 강조되고 다른 쪽에선 마녀사냥에 대한 비판이 이뤄진다.

사안에 따라 이 과정은 다소 달리 진행될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마녀사냥에 대한 논란 이후 관심은 급속히 약화된다. 결국 사생활 보호와 사이버 윤리 수립이 시급히 요청된다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교과서적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사건은 어느새 종료된다.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사건은 일회용 상품처럼 소비되며, 별다른 교훈을 남기지 못한 채 기억의 나선 속으로 사라져 간다.

둘째는 외모지상주의다. 우리 사회에서 외모지상주의가 도를 넘은 지는 이미 오래다. 한편에선 ‘루저 논란’에 담긴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도덕적 훈계가 이뤄지지만 다른 한편에선 수능이 끝났으니 성형의 적기라는 광고 또한 쉽게 접할 수 있다. 취업을 위해서도 결혼을 위해서도 성형이 적극 권장되는 사회, 외모가 학벌만큼 중요한 경쟁력으로 버젓이 인정되는 사회가 다름 아닌 우리 사회다.

신체에 대한 이런 생각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종교에서 이성으로, 이성에서 삶으로, 그리고 다시 욕망으로의 거대한 전환은 근대 사상의 흐름을 이뤄 왔으며, 지금 인류는 ‘욕망의 시대’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그 욕망의 대상이 바로 화폐와 신체에 집약돼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화폐와 신체에 대한 무한 숭배야말로 우리 시대의 서글프지만 정직한 자화상일 터다. 신체가 자본이 되고, 자본이 신체를 만드는 낯선 시대의 문턱 위에 우리는 어설프게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정보사회의 진전도, ‘욕망의 시대’의 만개도 비(非)가역적 경향이라는 점에 있다. 의미보다는 이미지가, 정신보다는 육체가, 가치보다는 욕망이, 과정의 진정성보다는 결과의 효율성이 절대 우위를 점하는 이러한 흐름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지구 사회 전체에 대한 새로운 문명사적 도전이다. 인류의 미래를 물론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삶과 존재의 의미를 묻는 철학은 여전히 유효한 인류의 프로젝트라고 나는 생각한다.

루저의 반대말은 당연히 위너(winner)다. 오래전 ‘승자는 모든 것을 갖는다(The Winner Takes It All)’는 7080 세대를 위한 노래도 있었다. 승자독식(勝者獨食)은 이제 세계화 시대의 보편화된 원리이자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세계는 이미 낯익은 풍경인가, 여전히 낯선 풍경인가. 한 알의 모래에 담긴 기이한 세계의 풍경을 지켜보는 마음, 겨울로 성큼 다가서는 11월의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적잖이 쓸쓸하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