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여성 할당' 질이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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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8일 오후 7시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사무실. 이곳에 남아 있던 여협 여성정책실장은 민주당 여성국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하루종일 각당에 "이번에도 '여성비례대표 30%제' 가 무산되면 가만 있지 않겠다" 는 반 협박성(?)전화를 해대느라 지친 상태였다. 전화는 낭보였다. '여성비례대표 30%안이 선거법에 포함될 것 같다' 는 전언이었다.

8시에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당법에 '비례대표 여성30% 할당제' 를 명시하기로 했다" 는 발표가 잇따랐다. 1994년 '할당제 도입을 위한 여성연대' 를 결성한 지 6년 만에 숙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시.도 의회의원의 비례대표 후보에 여성이 30% 이상 추천되도록 하는 ' '비례대표 여성 30% 할당제' 는 여성들의 정계 입문 물꼬를 트게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그냥 얻어낸 수확이 아니다. 94년만 해도 여성계는 최고 통치권자.당총재의 의지에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97년부터 '아예 정당법에 이를 명문화할 것을 요구하자' 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98년 국민회의가 요구를 받아들였고, 주저하던 한나라당도 지난해말 여성계의 끈질긴 요구를 수용했다.

이때 여성계는 '다 된 밥' 으로 생각, 환영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정치권과 엎치락 뒤치락하는 드라마의 시작이었다.

올 1월 15일 여야가 내놓은 선거법 협상 합의사항에는 눈을 씻고 봐도 '비례대표 여성 30% 할당' 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

자민련에서 이를 끝내 반대했다' 는 정보를 입수한 여성계는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낙천운동도 불사하겠다" 고 맞섰고 19일 이한동 총재에게서 "당론으로 정하겠다" 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달 7일 각당이 내놓은 선거법 개정안에서는 또다시 '비례대표여성 30% 할당제' 가 실종됐다.

여성계가 다시 성명서를 내고, 정치권을 성토함으로써 급기야 8일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된 것이다.

여협 오혜란 사무총장은 "정치권에서 마지못해 해준 것" 이라며 "정치권의 속을 다 들여다 본 것 같은 느낌" 이라고 말한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이 법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남녀 후보의 순서를 공정하게 배분하는 등의 실무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물꼬는 터졌다. 얼마만큼의 속도와 양으로 물이 흐를지 지켜볼 일이다.

이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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