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과 마주한 열정 39.5℃ 아이리스 이병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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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지난 2년 동안 이병헌은 해외 진출 영화 두 편을 찍었고,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시작했다. 잔뜩 고무된 주변의 반응과는 달리, 정작 그는 제자리에서 여유로운 모습이다.
20년 된 배우의 내공 때문일까, 아니면 익숙해진 열정 때문일까.

샤워하면서 거울에 비친 몸을 보면 상처가 셀 수 없이 많아요. 그 상처들을 보면
제 연기 인생의 히스토리를 보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게는 그 상처들이 무척 의미가 깊어요. 마치 ‘훈장’처럼


매번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하는 배우들은 보통 사람들의 몇 배나 되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20년 동안 작품을 선택하고 선택받고 살았으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이병헌은 매번 출연 결정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처럼 신중한 그가 많은 주저 끝에 선택했던 작품들이 연이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할리우드 진출작 ‘지.아이.조’와 미국과 프랑스 합작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 그리고 6년 만에 선택한 드라마 ‘아이리스’, 이 세 작품을 기다릴 당시 그는 자신의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었다.
“온갖 재료를 다 넣고 반죽을 해서 판에 얹어 오븐에 넣어놓은 기분이에요. 내 친구들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보고 있고…. 근데 사실 마지막에 뚜껑을 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거잖아요. 망친 떡이 나올지, 케이크가 나올지는. 사실 나도 뭐가 나올지 불안하죠. 나도 처음 만들어보는 거니까. 그런데 등 뒤에선 모두 포크를 들고 잔뜩 기대한 채 기다리고 있는 거죠.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에요.”

오븐 앞에서 가장 먼저 기다리고 있던 그는 최근 잇달아 나온 작품들의 반응을 보며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지난여름 개봉한 ‘지.아이.조’는 비록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이병헌이란 배우를 각인시켰다. 앞으로 제작될 후속편까지 출연 계약을 하면서 그의 할리우드에서의 성공 가능성은 더 커졌다. 다소 난해한 내용의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이하 나.비.다)도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되면서 호평을 받고 있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아이리스’(KBS 2TV)는 첫 회부터 시청률 24%를 넘겼다. 기획 단계부터 ‘한국형 첩보 액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화제를 모았던 ‘아이리스’에서 이병헌은 국가안전국의 최정예 요원 역할을 맡아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요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저절로 할 만큼 쉴 새 없이 뛰고 바닥을 굴러가며 촬영을 하고 있단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지.아이.조’에서 액션 연기를 하며 트레이닝을 탄탄하게 했지만, 현실감 있는 액션을 해야 하는 ‘아이리스’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와이어 줄에 매달렸을 때는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스턴트맨의 시범만 보고 똑같이 연기를 해내야 할 때는 그 순간을 피하고만 싶었단다.

아쉬울 것 없는 배우, 모험을 걸다

“전 솔직히 액션을 별로 안 좋아해요. 싸움 신 촬영이 있으면 며칠 전부터 ‘고생하겠구나’ 하면서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죠. 하지만 모든 배우가 그렇듯 열심히 할 수밖에요. 샤워하면서 거울에 비친 몸을 보면 상처가 셀 수 없이 많아요. 그 상처들을 보면 ‘언제 무슨 드라마를 할 때 생긴 거’라는 게 떠올라서 제 연기 인생의 히스토리를 보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게는 그 상처들이 무척 의미가 깊어요. 마치 ‘훈장’처럼.”
살이 찢긴 상처를 ‘훈장’으로 여길 만큼 그는 현장에서 오롯이 연기에만 열중한다. 박찬욱 감독이 ‘꼬치꼬치’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그는 ‘질문이 많은 배우’에 속한다. 촬영 도중에도 이해가 안 가거나 연기로 표현해 내기 힘든 장면이 있으면 어김없이 감독과 대화를 시도한다.

“연기를 하면서도 내가 왜 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 이 인물이 왜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자꾸 물어봐요. 그런데 감독이 ‘이유 없이, 단순하게’ 하라고 하면 배우로서 납득이 안 되죠.”

그래서 시나리오를 받으면 가장 먼저 스토리와 인물의 개연성을 찾는단다. 두 편의 해외 진출작에 출연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지.아이.조’보다 먼저 제안이 왔던 첫 해외 진출작 ‘나.비.다’에 출연을 결정하는 데는 일 년 남짓이 걸렸다. 난해하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스토리는 그가 추구하는 연기 스타일과 달랐지만, 당시 그는 안주하기보다 변화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제껏 해왔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악인’ 역할을 했지만, 연기를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정도로 새로운 경험을 했기 때문에 선택에 후회는 없단다. 그 후에 선택한 것이 인기 동명 만화를 영화로 만든 ‘지.아이.조’의 인상 깊은 악역 ‘스톰 쉐도우’였다. 또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고, 결국 그는 다시 한 번 모험을 걸었다. 처음부터 ‘할리우드에서 나는 조연일 뿐’이라는 자각을 했던 그는 연기력으로 승부를 보는 영화가 아닌, 연기에 대한 열정을 키울 수 있는 작품을 선택했다.

할리우드에서의 완벽주의자 생활

‘나.비.다’의 트란 안 홍 감독은 이병헌을 두고 ‘성실한 완벽주의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평소 친분이 두터운 조선희 사진작가도 그를 ‘깐깐하고 절대 칭찬하는 법이 없는 친구’라고 표현할 정도로 일을 할 때 그는 철두철미하다. 이병헌의 철두철미함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처음 경험하는 할리우드 시스템은 낯설기만 했다. CG가 많은 영화라서 폭발 장면 등의 리액션을 할 때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수많은 연습 끝에 디테일을 잡는 방법을 익혔다. 또 영화에서는 거의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으로 영어 대사를 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촬영장에서 악센트에 대한 지적을 수없이 받아야 했다. 악센트와 발음을 신경 쓰다 보니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매일매일 대사를 완벽하게 외워갔다. 그러는 중에도 만화 속 인물처럼 완벽한 근육을 만들기 위해 전문가에게 트레이닝을 받았고 영화에 나왔던 그의 탄탄한 복근은 촬영 내내 닭 가슴살과 달걀 등을 먹으며 식이 조절을 한 덕분에 얻은 눈물겨운 결과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를 자꾸 벗기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지.아이.조 2’에서는 안 벗으려고요(웃음). ‘나.비.다’에서는 맡은 역할이 격투를 하며 살아가는 남자라 ‘막근육’이 필요하거든요. 덕분에 저도 운동을 줄이면서 조금 편하게 지냈죠.”
프로페셔널한 배우는 할리우드에서의 조연 설움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 대신 어시스트에게 분장을 받았고, 오전 6시부터 촬영장에 나갔는데 10시간을 기다린 끝에서야 ‘촬영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듣고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시에나 밀러를 비롯한 출연 배우들이 파파라치에 시달릴 때,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그는 “신인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다”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동안 거친 역할을 많이 맡은 탓인지 실제로 마초 기질이 있는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는 상대 여배우뿐 아니라 스태프 막내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세심함과 소탈한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미국에 머물 때도 저를 알아보는 미국인들이 없어서 할리우드에 데뷔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프로모션을 하느라 레드카펫을 밟는 순간, 많은 기자와 리포터들이 나를 ‘스톰 쉐도우’란 영화 속 이름이 아니라 ‘병헌’이라고 불러서 그때 겨우 실감이 났죠.”
촬영을 마치고 한참 뒤에야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내가 이런 영화에 출연했구나. 정말 엄청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단다.

월드 스타라하기엔 너무 소탈한

잘생긴 외모와 탄탄한 몸매, 그을린 피부까지 남자다운 매력이 많은 이병헌. 그동안 거친 역할을 많이 맡은 탓인지 실제로 마초 기질이 있는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는 상대 여배우뿐 아니라 스태프 막내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세심함과 소탈한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평소 털털한 성격답게 스태프들과도 돈독하게 지낸다. 와인 파티와 삼겹살 파티를 여는 건 물론이고, 티셔츠나 자외선 차단제 같은 선물을 이미 많이 챙겨줘서 ‘아이리스’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통 큰 남자’로 통한다. 하지만 태권도와 격투 등 운동 실력은 좋음에도 유일하게 구기 종목만 허당이어서 ‘놈,놈.놈’ 촬영장에서는 공 한 번 차보지 못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했단다.

여배우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지 얼마 전 수애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이병헌과 영화 ‘그해 여름’을 촬영할 때 흔들리는 마음을 참느라 힘들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진작 말을 하지, 그럼 받아줬을 텐데(웃음)” 하며 위트 있게 받아넘겼다.

시원시원한 화법을 가진 그는 평소 생각하던 연애관에 대해서 털어놓기도 했다. “연애와 결혼은 오래전부터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스케줄이 너무 바빠 지금은 누가 곁에 있어도 견디지 못하고 떠날 것 같다”고.
그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요즘 너무 행복해서 이렇게 연기만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고 말하니 천생 배우일 수밖에 없다.
일본 팬들이 열광하는 한류 스타이자, 어느덧 연기 경력이 20년이나 된 이병헌은 타성에 젖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냥 하던 대로만 살아도 괜찮다’고 안주하기에는 너무 호기심이 많고 뜨거운 사람이었다.

취재_지희진(객원기자) 사진_이민희(studio l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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