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명 명의로 9900불씩 송금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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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를 불법으로 해외에 빼돌려 해외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자녀에게 재산을 증여한 외화 유출 혐의자가 무더기로 적발됐다.

8일 금감원은 지난해 1년간 해외로 거액을 송금한 내역을 조사해 124명의 불법 송금 혐의자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주로 미국과 중국으로 외화를 빼돌렸으며 일부는 동남아로 자금을 유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금감원 관계자는 "1인당 10만달러 이상의 외화를 불법 유출한 사람을 조사했다"며 "문제가 된 불법 송금액은 최소 1000만달러가 넘는다"고 말했다.

이중 44명은 금감원이 시중은행에서 10만달러 이상 송금한 사람의 자료를 받아 조사한 특별검사에서 적발됐고, 80명은 금감원이 시중은행을 직접 조사하는 일반검사에서 혐의가 포착됐다.

◆빙산의 일각=이번 1차 특별검사에서 적발된 44명은 전체 조사 대상자 가운데 혐의가 명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금감원이 조사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은 1200명에서 최대 2000명에 이른다. 따라서 앞으로 조사가 더 진행되면 외화 불법 유출 관련자는 계속 불어날 전망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이번 조사에선 누가 봐도 불법 외화 유출이 분명한 사례만 추렸다"며 "앞으로 불법 외화 송금자가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은 1차로 적발된 불법 혐의자들에 대해서는 9일 제재심의위원회에서 위반 혐의를 확정한 뒤 처벌 수위를 결정할 예정이다. 또 외화 불법 유출이 갈수록 심각해짐에 따라 앞으로는 상시로 불법 송금 행위를 조사하기로 했다.

◆어떻게 빼돌렸나=규정을 모르고 외화를 유출한 경우보다 의도적으로 돈을 빼돌린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적발된 한 기업은 미국 현지에서 단기로 돈을 빌려 부동산 등을 구입하는 데 썼다. 물론 한국은행에는 신고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직접 돈을 들고 나간 것은 아니지만 이 돈을 갚으려면 언젠가는 국내에서 외화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송금이나 다름없다. 또 다른 기업은 해외에서 조성한 자금으로 현지에서 투자를 하면서도 거래 중인 외국환은행에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국내에 마땅히 들여와야 할 외화를 들여오지 않고 현지에서 불법으로 돈을 굴린 것이다. 해외사업을 하는 기업들이 흔히 외화를 빼돌릴 때 쓰는 수법들이다.

C씨는 1만달러 이상 해외 송금은 모두 국세청에 통보된다는 규제를 피하기 위해 4~5명의 타인 명의로 9900달러씩 여러차례 돈을 해외로 송금했다가 복잡한 거래 내역을 수상히 여긴 감독 당국의 조사에서 적발됐다. B씨 역시 중국의 부동산을 살 목적으로 거액을 잘게 쪼개 송금한 것으로 드러났다. 금감원 관계자는 "저금리 추세가 지속되면서 돈 많은 사람들은 고수익을 좇아 해외 부동산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국내 부동산 경기가 부진한 것도 외화 불법 유출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무시되는 규정=사실 불법 송금을 통하지 않고도 개인이 해외에서 부동산을 살 수 있는 길은 이미 열려 있다. 한국은행에 신고만 하면 개인도 30만달러 이내의 해외 주택을 살 수 있고, 기업도 한은 신고만으로 해외 부동산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해외 골프회원권 구입이나 해외 차입도 신고 대상이다.

그러나 한국은행 외환심사과 조일래 팀장은 "그동안 개인의 해외 부동산 신고는 한건도 없었다"며 "규정을 제대로 모르거나 자금 출처 조사를 피하기 위해 불법 외환 거래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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