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상습범 '교정 상담소' 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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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 가정폭력의 재발을 막기위해 가해자의 가부장적 인식을 교정.치료하는 프로그램이 9월부터 본격 시행된다. 사진은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다룬 영화 ‘굴레를 벗고서’의 한장면. [중앙포토]

"아내가 집안 살림을 깔끔하게 못하면서 여자가 할 일을 내게 시켰다. 내가 실직하자 더 심해졌다."

가정폭력 사건을 저질러 법원으로부터 가정폭력 행위자 상담프로그램을 이수할 것을 명령받고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찾은 이모(38)씨.가부장적 사고방식이 강했던 이씨는 생계를 책임진 아내가 집안살림을 소홀히 하고 자신을 무시한다며 폭력을 휘두르고도 별 뉘우침이 없었다.

그러나 6주에 걸친 상담과정을 마친 이씨는 "다른 가정폭력 가해자들과 집단 상담을 하면서 내 잘못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가정폭력 행위자에 대한 교정 프로그램이 본격 시행된다. 여성부는 복권기금에서 34억원의 사업비를 확보해 이달부터 전국의 51개 상담소에서 이 같은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가해자 인식이 문제=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지난해 서울가정법원에서 위탁받아 상담한 가정폭력 가해자는 모두 117명. 이 중 상담과정을 마친 61명을 조사해본 결과 대부분의 행위자는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강했다.

이런 의식 상태는 평소엔 잠재해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 등 갈등상황이 닥치면 겉으로 드러나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교정 교육을 받은 김모(53)씨는 "내 말이 곧 가정의 '룰'이었는데 50대가 되자 아내와 아이들이 나를 무시해 소외감을 견디기 힘들었다"며 폭력을 휘두를 당시의 심리상태를 털어놓았다.

이 상담소의 박소현 상담위원은 "가정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구제하는 일이 급선무지만, 가해자의 인식을 바꿔놓아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가해자들은 폭력이 심각해 검찰.법원을 거쳐 상담소까지 왔으면서도 '별 일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박 위원은 "교정 프로그램을 마치면 가정폭력 재범률이 확실히 줄어들며 상담 과정에서 알코올 중독.의처증 등의 병을 찾아내 전문 치료로 연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교정 프로그램 운영은= 여성부가 지난해 연구 용역을 통해 마련한 가정폭력 행위자 교정.치료 프로그램은 5개월 동안 매주 1회의 개별상담(1시간)과 집단상담(2~4시간)을 실시한다. 이제까지는 몇몇 단체가 일정한 운영 기준없이 자율적으로 교육을 해왔다.

1998년부터 이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경우 개별 및 집단상담을 비롯해 부부관계 개선을 위한 교육도 함께 한다. 먼저 개별 상담과 설문조사 등으로 부부 갈등의 원인, 폭력의 빈도, 알코올 중독 등을 파악한 뒤 집단 상담을 통해 스스로 해결책을 찾도록 한다. 또 부부 대화법이나 갈등을 피하는 기법 등을 배우며 마지막에는 1박2일의 부부캠프를 통해 가족 화합의 기틀을 다진다.

여성부 정봉협 권익증진국장은 "미국 등의 사례를 볼 때 프로그램을 마친 이들의 60%가 적어도 6개월 동안 폭력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여성부는 연간 3000명 정도가 이 프로그램을 이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앞으로 지정 상담소를 전국적으로 100개까지 둘 예정이다.

가정폭력 행위자 교정 프로그램은 일반인이 신청한다고 모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원칙적으로 법원과 검찰이 지정하거나 명령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운영된다. 다만 상담소의 판단과 지침에 따라 법원.검찰을 거치지 않고도 참가할 수 있다. 관련 문의는 여성긴급전화 1366을 거쳐 가정폭력 상담소에 문의하면 된다.

◆날로 심각해지는 가정폭력=가정폭력방지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가정폭력은 매년 늘고 있다.

경찰청이 집계한 가정폭력사범 검거 건수는 2001년 1만4585건, 2002년 1만5151건, 2003년 1만6408건으로 늘었다.그러나 부상 등 심각한 상황이 발생해야 경찰을 찾는 게 보통이므로 신고된 건수는 일부에 불과하다.

실제로 여성부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02년 전국의 가정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상담건수는 무려 17만7413건이다. 특히 증가세가 무섭다. 99년 4만1497건,2000년 7만5723건, 2001년 11만4612건 등 매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진 탓도 있고 여성들이 자기권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것도 이유다.

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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