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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국회 입법 허와 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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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원 83%가 법안 냈는데…

17대 국회에서 법안 발의가 크게 늘어난 배경은 무엇보다 일하는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국정감사장에서 소리 지르고 지역구 경.조사 잘 챙기면 열심히 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제는 입법 활동이 곧 국회의원의 생명이라고 느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고 전했다. 그는 "한마디로 원내정당화가 궤도에 올라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거의 모든 의원이 경쟁적으로 법안을 발의하고 있다. 이전에는 일하는 의원이 따로 있었다. 이제 그런 구분이 없어졌다. 실제로 14대 의원 가운데 4년 임기 동안 법안을 한 건이라도 발의한 의원은 전체 의원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러나 17대에서는 1년이 채 안 됐지만 83%(249명)가 법안을 냈다.

숭실대 강원택(정외과)교수는 "보스정치 시대가 끝나면서 법안 발의 등 활발한 의정 활동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라며 "국회가 본연의 모습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전문가 그룹이 국회에 다수 들어오게 된 것도 '입법 풍년'의 한 이유로 꼽힌다. 열린우리당 강봉균 정책위 수석부의장은 "각계 전문가 출신 의원과 보좌관들의 자기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입법 활동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17대 입법 발의 건수 2위(29건)를 기록한 한나라당 박재완 의원의 경우 7명의 보좌관 전원이 법학.행정학.회계학 석.박사들이다.

16대 임기 중간에 신설된 법제실의 역할도 컸다. 법제실은 의원실에서 추진 법률안의 취지를 듣고 초안을 만들어 준다. 과거에는 의원실에 법률 지식이 없으면 법률안을 만들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런데 이런 기술적 장애물을 없애버린 셈이다.

◆ 정부 법안 일사천리 통과도 사라져=의원 입법이 양적으로만 늘어난 게 아니다. 정부 제출 법안의 심의 기능도 강화됐다. 열린우리당 정책실 관계자는 "과거엔 정부가 법안을 내면 쟁점법안이 아니면 구체적 내용 검토 없이 통과시켰으나 17대 들어서는 자구 하나하나 꼼꼼히 살핀다"고 전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12월 통과된 기금관리기본법이다. 정부는 연기금.부동산 투자 금지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을 국회에 냈다. 이를 여야 협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고쳤다. 연기금의 재정 안정성 및 기금 운용의 독립성.투명성 강화가 필요하다는 취지를 추가했다.

새로운 법률 제정이 크게 늘어난 것도 긍정적인 대목이다. 17대 국회에서 의원이 제출한 법률 제정 건수는 124건에 달했다. 같은 기간 정부 제출 법률 제정 건수(41건)의 세 배를 웃돌았다.

전진배 기자

*** 통과된 안건은 7개 중 1개

국회 의원회관에선 법안 발의 동의서를 들고 돌아다니는 보좌관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발의 법안에 서로 동의 서명을 해 주는 일종의 '품앗이'다. 2003년 국회법 개정으로 국회의원은 본인을 포함해 의원 10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법률안을 발의할 수 있게 됐다. 법안 입안에서 동의 서명, 국회 제출까지 단 하루에 끝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간단한 절차가 의원 입법을 양산한다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17대 국회 과반을 차지한 초선의원들이 법안 발의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17대 국회 초반 '법안 발의건수=의원의 능력'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법률 제.개정을 통해 불합리한 제도를 고쳐 보겠다는 의원들의 의욕도 있었지만, 입법 실적을 올리기 위한 선심성.생색내기용이라는 지적도 많다.

양적으로 팽창하다 보니 부실.졸속 법안도 많다. 같은 이름의 법안이 수십 건씩 발의되는 경우도 있다.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17대 국회 들어 모두 33건이 제출됐다. 의원들 사이에 사전 조율 과정 없이 제출됐기 때문이다.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아 대부분 폐기처분되거나 대표법안에 일부 흡수처리됐다. 심지어 "모 의원은 외국의 법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베꼈다"는 폭로까지 터져나왔다. 길게는 1~2년씩 법제처와 규제개혁위원회.관련 부처와 협의한 뒤 국회에 제출하는 정부 입법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실성과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끊이지 않는다.

◆ 부실 법안의 저조한 가결률=제출된 법안이 모두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도 아니다. 17대 들어 발의된 법안 1174건 가운데 처리된 법안은 349건(30%), 통과된 것은 159건(14%)에 불과하다. 이렇다 보니 의원들도 의원 입법 남발의 문제점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강봉균 정책위 수석부의장은 "법안 발의에 끝나지 않고 전문위원들과의 충분한 토론을 거쳐 처리될 때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다소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제도적으로 정부 입법 없이 의원 입법에만 의존하는 미국의 경우 한 의원이 수십 명의 보좌관과 정책 인턴들의 보조를 받는다. 의원을 통해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정부 부처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고려대 임혁백(정외과) 교수는 "의원들이 실적에 급급해 충분한 검토 없이 무책임하게 법안 발의를 남발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의원 입법을 내실화하기 위해 예산처의 의원지원을 늘리고 인턴제도를 활성화하며 정책담당 보좌관을 상설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소영 기자

*** 이런 법안도

17대 국회에서는 이색.아이디어성 법안이 쏟아졌다. 주로 초.재선 의원들이 제출한 법안이다.

한나라당 고경화 의원은 아동을 입양한 부모에게 출산휴가와 같은 기간의 '입양 휴가'를 주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냈다. 고 의원은 법안에서 "우리나라는 아직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며 "직장에 다니는 입양 부모들이 육아 부담을 덜고, 입양 아동과 친해질 수 있는 기간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은 유아용 기저귀와 여성 생리대에 부가세를 면제해 주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낮은 출산율로 사회 노령화가 심화돼 노동력 부족이 우려된다"며 "출산 장려 및 모성 보호, 양성 평등을 도모하자는 취지"라고 그는 설명했다.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은 설.추석 연휴 동안 고속도로 통행료 징수를 면제하는 유료도로법 개정안을 냈다. 도로 정체를 줄이고 서민 경제를 돕겠다는 취지다. 열린우리당 노웅래 의원은 청소년이 유해 프로그램을 보지 못하도록 전자 차단 장치를 TV에 의무적으로 장착하게 하는 방송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잘못된 국회 관행을 고치자는 법안들도 있다. 열린우리당 노현송 의원은 국회의원의 배우자, 4촌 이내의 혈족, 인척을 보좌진으로 임명할 수 없도록 하는 국회의원 수당법 개정안을 냈다. 같은 당 박영선 의원은 국민이 의원의 입법 활동을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회의 출석 및 표결 참여 횟수 등을 국회 공보에 싣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이들 법안 중 아직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없다. 일부 법안에 대해서는 "황당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법안 제출만으로도 해당 사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정부 관계자는 "아무래도 정부는 관련자가 적거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필요한 입법 사안에 착안하기 힘들다"며 "의원들이 이런 법안을 많이 제출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법안이 특정 지역.계층 이기주의에 빠질 가능성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선하 기자

*** 37 → 42 → 51개 의원 연구모임 후끈

국회 내 각종 회의실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이기호씨는 17대 국회 들어 업무량이 두 배 이상 늘었다.

의원들의 세미나.토론회 일정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16대엔 1주일 전이면 강당.대회의실 등을 예약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최소 두 달 전에는 예약해야 한다"고 이씨는 말한다. 의원 보좌진 사이에선 "회의실 예약이 골프 부킹보다 힘들다"는 말까지 나온다.

17대 들어 더욱 활발해진 '의원 연구모임'이 왕성한 입법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 등록된 연구단체는 51개로 16대 국회(42개)와 15대 국회(37개)에 비해 크게 늘었다.

연구단체로 등록하려면 동일 교섭단체에 속하지 않는 12명 이상의 의원이 뜻을 모아야 한다. 또 의원 한 명이 3개 이상 단체에 가입할 수 없다. 따라서 17대 국회의 모임 51개는 사실상 만들 수 있는 최대 개수인 셈이다.

임시국회가 열렸던 이달 첫째 주에도 국회 곳곳에서 토론회가 열렸다. 쌀 협상 국정조사, 로비스트 법제화, 디지털 날염산업, 보육정책, 행정도시 후속과제, 위기의 한국 낙농업 등에 관해서다. 국회가 올해부터 모범적인 연구활동을 하는 단체를 적극 지원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단체 간 선의의 경쟁도 벌어지고 있다.

올 3월에 2004년도 최우수 의원 연구단체로 뽑힌 농어업 회생을 위한 의원모임(대표의원 한화갑)은 한 해 동안 3500만원을, '국회 좋은 교육연구회'등 10개 우수 모임은 3000만원의 연구지원비를 받게 됐다. 지난해엔 모든 연구단체에 일률적으로 1400만원이 지급됐다.

연구모임 활동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새 법안이나 개정안을 제출해 통과시켰느냐 여부다.

연구단체 심의위원회는 "입법기관이라는 국회 본연의 임무에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장경제와 사회안전망 포럼'을 운영하는 열린우리당 정덕구 의원 측은 "격월로 포럼을 열 때마다 20~40명의 의원이 참가해 전문가 영역으로 치부돼 온 경제 분야에 대해 진지한 토론이 벌어진다"며 "관련 법안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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