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Enough is Enough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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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이런 상반된 주장을 놓고 어느 쪽을 따르겠는가. 이를 판단할 기준은 없는가. 나는 이 문제가 대통령과 예비후보라는 입장의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보고 싶다. 원칙이니 신뢰니 하는 말은 수사학처럼 들린다. 이 대통령도 후보일 적에는 이를 그대로 하겠다고 했다. 표 때문이었다. 다음 선거를 의식해야 하는 박 전 대표 역시 대통령이 후보 때 갖던 마음을 지금 똑같이 갖고 있을 것이다. 2005년 당시 여야가 이 도시계획을 합의했을 때 박 전 대표는 지금 상황과 똑같이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다. 그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대통령을 노리는 후보다. 지금도 그때와 같이 선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논리는 간단하다. 대통령 말을 더 믿을 것인가, 아니면 후보의 말을 더 믿을 것인가. 선거에 나설 사람과 선거에 다시 나서지 않을 사람 중 누구 말이 더 믿을 만한 것일까. 인기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 중에 누구를 더 신뢰할 것인가. 또 하나의 기준이 있다면 ‘누가 이 문제로 이득을 보는가’이다. 대통령은 “원안대로 하면 나는 편하다”고 말했다. 그는 후보로서 약속을 했으니까 그대로 가겠다고 했으면 이런 분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약속을 어긴다는 비판도 안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적 손해를 보면서 이를 수정하려 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원안을 수정하면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원안을 고수해야 그녀에게는 이익이 온다. 나는 이렇게 공익이 걸린 문제에선 개인적으로 손해를 보는 쪽에 더 진실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도시란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필요의 산물이다. 필요하면 자연스럽게 모이게 돼 있다. 그게 도시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상호작용을 통해 더 많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창출한다. 큰 도시일수록 그래서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뉴욕, 런던, 상하이가 더 커지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계획도시가 사회주의적이라고 한다면 자연발생의 도시는 시장경제와 같다. 세종시의 문제는 계획도시라는 문제에다 한술 더 떠 정치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처음부터 세종시는 ‘표 놀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수도 이전으로 재미 좀 봤다”고 이미 고백하지 않았는가. 잘못된 것은 한나라당이었다. 표에 코가 꿰어서 줄줄 따라간 사람들이 아닌가. 결정 당시에도 행정부처를 옮겨 그 도시가 살아날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행정부처를 옮기고 거기다가 알파까지 보태라는 것 아닌가?

대통령과 후보는 다르고 당연히 달라야 한다. 어느 대통령이든 임기 중에 대통령직에 책임을 진다. 대통령직을 어떻게 지켰느냐에 따라 대통령의 색깔이 달라진다. 우리는 그를 선택한 이상 자기 색깔의 대통령직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임기 초반부터 유력한 차기 후보가 자기 색깔을 칠하려고 한다면 지금의 대통령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이 논의의 가장 큰 맹점은 정파 또는 개별 정치인의 이익에 매몰돼 있으면서 그렇지 않은 듯 국민을 호도하는 데 있다. 세종시의 근본 문제는 여와 야, 이명박과 박근혜의 싸움이 아니다. 국가 전체의 장래에 관한 문제다. 통일을 염두에 두고, 대륙으로 뻗어나갈 우리의 잠재력을 가늠하면서 과연 이 순간 지역정치에 얽매여 퇴행의 길을 걸을 것이냐, 아니면 이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냐의 문제다. 충청도의 이익보다 나라 전체의 이익이 더 크고 더욱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자신이 겪었던 일이라 박 전 대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충청도 사람들에게 좌절을 주지 않는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도 정치놀음의 희생자다. 박 전 대표 역시 그만하면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밝혔다. 다음 선거에서 충청도를 배반했다는 소리는 최소한 듣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분란을 접어야 한다. 그만하면 충분했다(Enough is Enough).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