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부름과 응답 그리고 존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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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해 12월 초 보스턴 근교의 워세스터시의 폐허창고에서 불이 났다.

대수롭지 않은 불이었는데 소방관 6명이 숨졌다.

진화작업 중에 이 창고에 홈리스(걸인) 2명이 산다는 소문이 들렸다.

구조대 2명이 혹시 있을지 모를 두 걸인을 구하기 위해 긴급히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구조대가 나오지 않자 이 구조대를 구하기 위해 4명의 구조대가 다시 구성됐다.

그들 역시 불길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걸인, 그것도 혹시나 하는 추정뿐인데도 불길 속을 뛰어든 2명의 구조대. 그들이 불길 때문에 나오지 못한 것을 뻔히 보고도 다시 뛰어든 4명의 동료…. 무슨 힘이 이들을 불길 속으로 뛰어들게 만들었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장례식에서 이들은 "누가 우리를 지켜 줄 것인가" 라는 부름(calling)에 "여기 내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십시오(Here am I. Send me.)" 라고 응답한 사람들이라고 추모했다.

워싱턴 몰(광장)에 1994년 세워진 한국전 참전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한번도 만나보지 않은 국민(한국민), 자신들이 결코 알지도 못하는 나라(한국)를 지키라는 부름에 응답한(answer the call) 우리 아들.딸들을 우리 국민은 존경한다. "

듣도 보지도 못한 동양의 한 작은 나라를 위해, 단지 국가가 자신들을 부른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가서 생명을 던진 그들을 나라는 한없이 존경한다(honour)는 것이다.

나라의 부름에, 사회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을 국가나 국민은 결코 버려두지 않는다.

지난 95년 여름 보스니아전쟁 때 미공군 조종사 오글래디 대위가 대공포에 맞아 적진(敵陣)에 떨어졌다.

6일 동안 그는 이슬과 개미를 먹으며 숨어 지냈다.

그는 "나는 단 한번도 우리나라가 결코 나를 버려둘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 확신이 나를 견디게 만든 힘이 됐다" 고 말했다.

실제 이 한명을 구하기 위해 십수명의 특공대가 조직됐다.

국가에 헌신한 이 한명을 살리기 위해 또다시 십수명이 목숨을 건 것이다.

특공대를 지휘했던 해병대 장교는 "우리 임무는 그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든 살든 우리는 부름에 응한 것뿐" 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도시마다 행사가 있으면 맨 앞에 서는 것이 제대군인들이다.

할아버지들이 당시의 군복을 입거나 미군 삼각모를 쓰고 성조기를 앞세우고 행진한다.

시골 구석에도 중심가에는 현충비가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동네 청년 중에 2차대전.한국전.월남전에 참가했다 전사한 사람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워싱턴 월남전 기념비나 앨링턴 묘지에 가보면 '국가를 위해 봉사한 사람을 존경하자(Honour those who served)' 는 팻말을 흔히 볼 수 있다.

워세스터의 순직 소방관들에 대한 추모가 끊이지 않는다.

지역사회가 이들의 자녀를 위한 기금 마련에 나섰는데 순식간에 4백만달러가 모였다.

돈많은 사람이 내놓은 뭉칫돈이 아니라 5달러짜리 수표만 수천장이 넘었다.

현장을 찾아가 묵념을 올리는 시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폐허 속에 꽃다발이 산을 이루었다.

한 소방관 딸은 이런 비극을 볼 때마다 소방관 일을 그만두라고 아버지를 말리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너는 알지 않니" 하며 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위대한 영웅의 모습을 읽는다고 기고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군 복무자에 대한 특혜 시비가 한창이다.

가산점 시비를 떠나 우리는 나라의 부름에 응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을 어떻게 취급했는가 반성해야 한다.

6.25전쟁때 포로가 돼 강제노역으로 신음하며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을 50년이 넘도록 거들떠보지 않는 나라, 부름에 따라 군대가는 사람은 '곰바우' 가 되고 요리조리 빠진 사람은 요령 좋은 인물로 부러움을 사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각오가 나올 수 있는가.

그런 나라가 힘있는 나라가 될 수 있겠는가.

문창극 <미주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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