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이명박의 데자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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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36년 전인 1973년 11월9일-.

오원철 당시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시를 향해 출발했다. 전날 들은 대통령의 지시는 말이 특명이지 “다녀와! 내일 떠나도록 해” 이말 뿐이었다. 철강도시(스틸 시티)로 알려진 피츠버그는 당시 세계 최대석유메이저인 걸프사의 본사가 있는 곳.

한 달 전인 10월6일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제4차 중동전쟁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나라와 원유거래를 하던 걸프, 칼텍스, 유니온 오일 등 3사가 평균 22%의 공급축소를 통보해 온 것이다. 이는 곧 경제마비를 의미한다.

박대통령의 특명은 수치목표도 없이 무조건 해결하고 오라는 것이니 오 수석으로서는 일생일대 이처럼 골치 아프고 부담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훗날 자신이 ‘ 전권 특공대장’ 이나 다름없었다고 털어놨다. 결과적으로 피 말리는 협상에서 충분한 물량을 확보하는 승전보를 알려왔으나 지금 생각하면 에너지 구걸외교가 아니었던가.

우리나라의 60~70년대 경제사에서 가장 큰 시련을 몰고 온 ‘제1차 에너지 위기’ (석유파동 또는 오일쇼크라고도 함) 의 시작이었다. 1973년 10월에 시작해 75년 중반에 끝났다.
1973년 원유수입액은 3억 516만 달러였는데 74년에는 11억 78만 달러로 급증했다. 이에 따라 경상수지 적자도 73년 3억880만 달러에서 74년 20억 2270만 달러로 늘어났다. 자본거래를 보면 73년 2억 9000만 달러를 외국서 빌려왔는데 74년에는 19억9840만 달러를 빌려와야 했다.
아랍국의 석유판매 금지→석유가격폭등→국제 상품 값 폭등→국내 물가파동→무역적자심화 →국가경제 파탄이란 악의 고리가 형성됐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원유확보 작전→긴급경제조치에 의한 물가파동 잠재우기→역발상을 통한 중동진출과 달러회수의 수순을 밟으며 위기를 헤쳐 나갔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중동진출이었다. 나라의 능력을 올인 한 것이다. 플랜트 등 기술용역사업을 키우기 위한 엔지니어링회사들 설립, 70년대 경제를 짊어진 기능사의 대대적인 양성 등이 주효해 경제발전의 기틀을 확고히 잡은 것이다.

1973년 1월 12일 대통령 연두기자 회견의 중화학공업화 선언과 국민과학화선언아래 추진되던 중화학공업건설, 방위산업육성, 100억 달러 수출목표 등이 오일쇼크로 흔들렸으나 중동 전략으로 역전, 더욱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이 힘은 2차 에너지 위기를 거쳐 79년 박 대통령의 유고시까지 이어졌다. 중화학공업은 지금도 우리경제의 가장 큰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오원철 수석이 제시한 ‘경제 강국으로 가는 길’ 은 이제 제 1장을 끝내고 제2장으로 들어갔다.
2009년 9월 피츠버그는 우리에게 쓰라린 과거를 한꺼번에 털게 하면서 선도외교의 길을 열어 주었다.

금융위기 후의 세계 경제의 틀을 어떻게 만들 것이지, 기후변화와 에너지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등 세계적인 현안과 과제를 협의하는 G20(세계 20개 국가 및 지역) 정상회의의 멤버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내년 G20의 의장국이 돼 서울서 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작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밝힌 ‘저탄소 녹색성장’ 국가비전이 그린뉴딜을 추진하는 세계 각국에 모범사례로, 금융위기를 제조수출산업으로 재빨리 극복한 나라로 평가를 받게 된 덕이다.
우리경제는 불황의 긴 터널은 빠져 나오는 것 같지만 호황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었다. 아주 까다로운 시기다. 세계를 선도할 녹색성장 정책도 다 마련됐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정책의 우선순위와 강약을 따져야 한다.

12월 7일부터 18일까지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기후변화와 에너지 관련한 국제회의( 2013년 이후의 포스트 교토체제를 만드는 일) 가 열린다. 채 한 달이 안 남았다. 이 회의에선 세계국가 전체가 정해놓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각국이 어떻게 나눠 부담할 것인가와 선진국이 개도국의 환경발전을 위해 얼마나 지원해줄 것인지를 논의 또는 결정하게 된다. 각국의 실력과 속셈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동시에 환경과 기술외교의 진검승부가 펼쳐지는 장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과 참모들은 G20 서울유치→코펜하겐에서 이산화탄소 배출 수치목표제시 →G20 서울 개최→ 국가경쟁력 및 브랜드력 강화라는 프로세스를 그리고 있다. 정부는 녹색성장에 올인하고 있다.

‘ 데자부 (deja vu) ! ’
박정희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 강국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작년 중반 배럴당 150달러까지 올라 세계를 긴장시켰던 석유가격도 현재 80달러 전후에서 머물고 있지만 다시 뛸 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는가.

마침 9일 저녁 오원철 전 수석은 과학기술계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그의 저서 ‘불굴의 도전 한강의 기적-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을 만들었나‘ 의 영문판 출판 기념식을 했다.

곽재원 중앙일보 중앙종합연구원장 겸 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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