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칼럼] 기획을 위한 기획은 곤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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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연도.세기.천년이라는 시간의 단위가 중첩해 바뀌는 일을 두고 모두들 기대가 많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장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이 없었다. 시간의 단위가 바뀌며 가장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일은 물론 'Y2K' 라고 불렸던 컴퓨터 2000년도 인식 오류문제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려' 의 대상이었지 '기대' 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행히 이 문제는 큰 탈 없이 넘어간 것으로 판명이 났다. 따라서 시간의 단위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담담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중앙일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시간의 단위가 시작되며 중앙일보는 이런 저런 기획을 많이 내 놓았다.

우선 사고(社告)의 형식으로 3일자 1면에는 '중앙일보 12대 사업' 이 제시됐고, 4일자 2면에는 '오피니언 페이지 새 모습 새 출발' 이 던져졌고, 5일자 3면에는 '인터넷 총선 증시 엽니다' 가 등장했다.

또한 지난 주에는 '21세기로 맞추자' 를 비롯해 '16대 국회를 향해 뛰는 사람들' '떠오르는 대륙 유라시아' 등의 기획물이 선을 보였다.

그러나 사실 이 정도의 기획은 지난 해 말은 물론이고 어느 때라도 중앙일보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의 기획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새로운 시간의 단위가 출발하는 순간을 전후해 중앙일보가 특별히 변한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평가인 셈이다.

연초에 제시된 중앙일보의 계획이 올 1년 동안 얼마나 성의 있게, 그리고 지속성을 가지고 추진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할 부분이 나타나고 있어 걱정을 하지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3일자 1면에 제시된 중앙일보의 12대 사업은 전혀 구체적인 활동의 일정과 방법이 제시돼 있지 않다.

만약 12가지 사업 중 한 가지라도 관심을 가진 독자가 보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궁금해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 1년 동안 매일 중앙일보를 읽으며 후속 안내 기사를 찾아야 하는 방법 말고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독자의 눈 높이에 맞추기 위해서는 사업과 관련해 문의할 부서는 어느 곳이고 책임자는 누구인지를 밝혀줘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 4일자 2면의 '오피니언 페이지 새 모습 새 출발' 안내는 지금까지의 관행을 과감히 벗어 던진 참신한 시도로 평가된다.

사실 지금까지는 여론의 흐름을 반영하는 시론 등의 칼럼을 외부의 필자에게 맡길 때 그 기준이 무엇인지, 즉 왜 그 사람이 필자가 되는지를 독자는 알 수 없었다.

중앙일보가 이러한 관행을 과감히 탈피해 '중앙시평' 과 '중앙포커스' 의 필자를 미리 소개한 것은 신문제작의 투명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의미 있는 일이다.

물론 왜 그 분들이 필자로 선정됐는지도 설명해 주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지만. 중앙일보의 시도를 계기로 다른 신문도 이러한 방향으로 제작이 진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지난 주 중앙일보 지면에서 경쟁지와 비교해 가장 색다른 시도를 한 부분은 6일자 1면의 머릿기사 '제2의 벤처 밸리, 대덕단지가 뜬다' 였다.

벤처산업의 요람으로서 대덕단지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깊이 있게 취재한 기사를 머릿기사로 내세움으로써 이날 중앙일보는 다른 신문과 차별화에 성공했다.

'경제에 강하다' 는 중앙일보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를 이 머릿기사는 재확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 나라의 경제가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가의 문제에도 강한 함의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중심으로 머릿기사를 뽑는 관행 때문에 모든 신문이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의 경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편집은 앞으로 각각의 일간지가 머릿기사를 이용해 자신의 색깔을 어떻게 분명하게 나타낼 수 있는가를 보여준 좋은 기회였다.

한편 5일자 김영희 대기자의 '아시아 정신 회복하자' 와 사회면의 '동양학 열풍' , 그리고 7일자 학술면의 '김용옥 교수에 대한 철학계의 반응' 에 관한 기사는 모두 동양의 역사적 전통을 독자들이 재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어 좋았다.

또 수도권면에 실린 음성직 전문기자의 기사 또한 교통문제에 정책대안을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제공함으로써 관심을 끌었다.

유석춘<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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