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읽기 BOOK] 영산강 350리, 걸으며 강과 들에 말을 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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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영산강
신정일 지음, 창해
360쪽, 1만7000원

글쓴이 신정일은 세상을 거슬러 산다. 가까운 데는 차로 가고, 먼 데는 걸어서 간다. 길 위에 있는 시간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많다. 무슨 거창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흙 냄새가 좋고 바깥 공기가 좋아서다. 이 땅의 웬만한 강은 다 훑었다. 어지간한 산은 다 올랐다. 영남대로 960리, 삼남대로 920리, 관동대로 920리…. 길 없는 길까지 찾아 걷는다. 우리땅걷기 모임을 만들어 지금껏 함께 다닌 이들은 셀 수 없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에 걷기 바람을 일으킨 원조나 선구자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작년 가을 그와 걸었다. 심심할 틈이 없었다. 풀숲에서 정금열매를 건네주며 가을 산은 가난한 처갓집 가는 것보다 낫단다. 길가의 감 하나 슬쩍 따며 자신이 ‘한국좀도둑연합회장’이라느니 “우리 땅 최대지주인데 사람들이 세금을 안 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투박한 목소리로 한 곡씩 뽑는 노래엔 흥이 있다. 가수 지망생이었던 삼촌 곁에서 소시 때 배운 노래다. 1000여 곡의 가사를 꿰고 있다. “뭐 할라고 걸어요, 돈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란 농에, “걸으니 돈도 나오고 밥도 나와요, 책도 내고 사람들이 불러 주고…”라며 맑게 웃었다.

호남에 ‘광나장창’이란 말이 있다. 유림의 고장으로 광주·나주·장성·창평을 빼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모두 영산강이 품고 있는 고을이다. [중앙포토]

그가 그간 걸으며 낸 책이 40여권이다. 이 책은 영산강 삼백오십 리 길의 닷새 여정을 기록한 내용이다. 지류인 황룡강·극락강·지석강을 먼저 훑고, 본류인 영산강을 따라 목포까지 내려가는 길이다. 담양·장성·화순·나주·광주·목포 같은 물가 도시와 마을의 얘기가 푸근하다. 강을 낳은 산 이야기는 깊다. 거기 기대 사는 이들의 사연에는 온기가 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광주민주화운동 부분에선 저릿하다. 영산포 홍어, 몽탄 숭어, 영암 어란 얘기에 이르러서는 군침이 돈다. 견훤과 왕건이 나오고 정약용과 이순신이 등장한다. 시인 김수영도 한 자락 걸친다. 뜬금없이 슈베르트·테레사 수녀·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나와서 한마디씩 한다. 무지막지하게 읽어온 책에서 얻은 내공이 묻어난다. 걸으며 깨달은 지혜가 녹아있다.

감상을 피하려 애썼지만 강을 바라보는 저자의 눈길은 애틋하다. 보에 막혀 느릿한 물, 자취만 남은 번성했던 나루터 풍경, 쓸모 없어진 강가의 등대를 보며 먹먹하다. “강은 그대로 두는 게 살리는 거야. 흘러야 강이지” 저자는 강이 소멸하는 하구 둑에서 흘러도 흘러도 넘치지 않는 바다가 되고 싶어 한다. 잎 다 지기 전에 강 나들이 한번 하면 어떨까. 남도의 겨울은 따뜻하다.

궁금한 게 있어 전화 걸어 물어봤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귀신사 뒤로 난 돌계단 꼭대기 자리다. 귀신사는 전주 모악산 자락에 있다.

안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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