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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낭만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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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75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미국의 핵우산 보장이 없으면 핵무기 등을 개발할 것"이라고 했다. 당시 청와대는 재미 한국 과학자를 몰래 불러들이며 이미 작업에 나선 터였고, 미국은 이에 잔뜩 긴장해 있을 때였다.

그러던 77년 6월. 세계적 이론 물리학자인 재미 과학자 이휘소씨가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42세에 사망했다. 경기고 2년 때 서울대 공대에 진학한 뒤 도미, 물리학을 전공해 28세에 펜실베이니아대 정교수로 채용된 수재였다. 당장 '한국의 핵개발을 막으려는 미국 특수기관의 소행'이란 소문이 퍼졌다. 이후 이휘소는 좌절된 한국 핵개발의 상징으로 남았다. "이휘소만 살아있어도…."

그 아쉬움은 93년 김진명의 장편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폭발했다. 글에서 '이용후'란 이름으로 환생한 그는 죽은 몸이지만 남북 공동 핵무기 개발의 기초를 제공한다. 미국.일본 합작의 한국 침공에 대항해 공동 핵탄두는 위력을 톡톡히 발휘한다. '미.일의 한국 공격'이란 자극적 테마와 '남북 공동 핵무기 개발'이란 감성이 결합한 소설이다. 그 감성은 '북한 핵무기도 결국 우리 핵무기'란 '핵 낭만주의'로 바뀌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핵무기 개발의 부담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핵개발 과정에서 겪은 수모에 대해 중앙일보 발행 '청와대 비서실 2권'은 관계자의 얘기를 이렇게 전한다.

"76년 과학기술처 장관실에서 열린 한.미 원자력 관련 협의회에 국무부 차관보가 왔다. 그는 상말을 해가며 '재처리의 재자도 뻥끗 말라'고 했다. 이게 우리 위상이었다.""70년대 중반 주한 미 대사관 과학관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일방적으로 쳐들어 와 수시로 조사했다."

당시 힘이 없어 미국에 당했지만 지금은 좀 세졌으니 다르다고 할 것도 아니다. 지금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낱낱이 보고 하고, 그들은 샅샅이 뒤진다. 문제가 드러나 유엔 안보리에라도 가게 되면 제재가 기다린다. 그러면 국가 신인도는 땅에 떨어져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곧바로 허덕거리게 된다. 오죽하면 석유 강국인 리비아가 핵을 포기했겠는가. 최근 원자력연구소가 우라늄 0.2g을 추출한 데 대해 "드디어 핵무기 제조 기술이 생겼다"고 기뻐하는 견해가 있다. 우리끼리는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어도 세계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는 게 문제다. 낭만은 현실이 아니듯 '핵 낭만주의'도 현실에선 힘이 못된다는 데 비극이 있다.

안성규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