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뒤통수 맞은 통일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민관 합동 시무식이 열린 3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신년사를 듣는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의 얼굴표정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국무위원석에 같이 있던 한 참석자는 "신년사 중 대북(對北)제의 대목에서 朴장관이 갑자기 당혹해하는 것같다" 고 전했다.

같은 시간 TV중계를 지켜보던 통일부 당국자들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에 확인전화를 거는 등 한바탕 부산을 떨었다. 통일부가 모르는 '남북경제공동체' 를 구성하자는 대북제안이 신년사에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金대통령은 "남북이 협력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남북경제공동체 구성을 위한 국책연구기관간 협의를 갖자" 고 제안했다.

시무식이 끝난 뒤 기자실에 들른 朴장관은 착잡해하는 목소리로 "실.국장으로부터 보고받은 바 없고 내용도 듣지 못했다" 고 실토했다.

朴장관은 "임명장을 받고(지난해 12월 24일) 한 번도 대통령과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며 "전임 장관(林東源국정원장)한테서도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 고 설명했다.

이런 사정은 통일정책실장이나 청와대에 파견된 통일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김형기(金炯基)실장은 북한의 호응 가능성을 묻자 "답변하기 곤란하다" 며 말끝을 흐렸다.

통일부는 갑작스런 대북제의에 어떤 후속조치를 취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어느 국책 연구기관이, 어떤 경로로, 북한의 누구와 만나야 할지도 결정 못한 상태다.

사태가 이렇게 꼬인 데는 부서간에 사전 면밀한 협의보다 즉흥적인 발상과 판단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정부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남북경제공동체' 구성 제의 문제와 관련, 정부 관계자는 "이 문제는 당초 5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논의될 예정이었으나 청와대측이 '신년사가 밋밋하다' 며 급히 추가된 것" 이라고 해명했다.

金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98년 3월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대북정책은 통일부 중심으로 수행하라" 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런 원칙은 깨졌고 과거 정부의 대북정책 혼선을 탈피하겠다던 현 정부 역시 구태(舊態)답습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전에 충분한 검토나 협의를 거치지 않은 주요 대북제안이 '한건주의' 식으로 터져나온 때문이다.

이영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