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지하철 노조의 신선한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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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지하철공사 노사(勞使)가 전격적으로 인력감축 등에 합의했다는 소식은 걱정스럽던 올 노사관계에 한줄기 빛을 비춰주는 신선한 충격으로 평가된다.

보도에 따르면 서울지하철 노사는 지난해 12월 30일 밤 1천6백명 감축.4조 3교대 폐지.임금인상 등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노조측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로시간 단축을 요구하던 종전과는 정반대로 '시민의 라이프 사이클 변화를 고려해 지하철 운행시간을 연장하자' 는 제안까지 내놓는 등 사뭇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협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 반대 의견이 만만찮은 가운데 조합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하는 절차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변수에도 불구하고 서울지하철 노조의 변신은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동안 강경 투쟁의 선두에는 서울지하철 노조가 있었고, 지난해 4월에는 무려 8일간 파업해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기도 했다.

그랬던 서울지하철 노조의 변신은 이제 한국의 노동운동사에서도 '투쟁과 반목' 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희망을 갖게 한다.

역시 강성으로 소문이 났던 한국통신.기아자동차 노조가 온건 노선으로 선회한 데 이은 또하나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서울지하철 노조가 이렇게 바뀐 배경에는 무엇보다 배일도(裵一道)위원장의 공이 컸다. "투쟁 일변도의 노동운동은 바뀌어야 한다" 는 그의 논리는, 그가 지난 1987년 서울지하철 노조의 초대위원장으로 초강경 노선을 주도했던 인물이기에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도 노동운동을 둘러싼 사회적 여건과 사용자측의 끈질긴 노력, 그리고 조합원.시민의 의식변화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난해 裵위원장이 온건 노선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1차 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어 위원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변화의 서막이었다.

올해 우리 경제의 당면 현안 중 하나는 노사관계다. 노조 전임자 임금 문제를 골자로 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을 둘러싸고 한국.민주노총 등이 잔뜩 벼르고 있는 데다 4월 총선이란 정치적 변수까지 겹쳐 노사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컸다.

외환위기의 배경에는 정부.기업 못지않게 근로자들의 지나친 '내 몫 요구' 도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노사 갈등이 자칫 경제회복에 찬물을 끼얹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서울지하철 노조는 노동계로 하여금 세상이 달라졌음을 인식하고 제도권 안에서 화합과 공생(共生)의 길을 찾도록 촉구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사용자측의 고통분담과 원칙에 충실하는 정부의 노력이 병행돼야 변화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것이다.

쇠 파이프와 붉은 머리띠가 사라지는 원년으로 새 천년 새해가 자리잡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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