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폐결핵촌 얼굴없는 쌀부대 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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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비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20여분 씩씩대며 올라가야 하는 은평구 구산동 산61 일대. 서울에서 유일한 폐결핵 환자 집단거주 마을이다.

정부로부터 한달에 16만원씩 생활보조금을 받는 극빈층 결핵환자 1백80여명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있다.

흥청대는 연말 분위기와는 달리 이웃돕기성금이 예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요즈음. 구산동 산동네 사람들은 익명의 손길 덕에 겨울을 비교적 따뜻하게 보내고 있다.

지난 16일 오전 쌀을 가득 실은 16t 트럭이 동네 입구에 멈췄다.

곧바로 20~30대 장정 10여명이 나타나더니 20㎏짜리 쌀을 짊어지고 골목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3~4부대씩을 내려다 놓았다.

동네 사람들이 "어디서 왔느냐" 고 물어도 이들은 "건강하시고 잘 지내세요" 라는 말만 하곤 험한 길을 오르내리며 쌀을 날라주고 돌아갔다.

이상한 일은 거주자를 미리 파악한 듯 가구마다 쌀의 양이 다르게 배달됐다.

그렇다고 미리 동사무소나 행정관서를 통해 자료를 받아간 것도 아니라고 한다.

산동네를 담당하고 있는 손신기(孫神技.38)사회복지사는 "비밀작전이라도 하듯 담당직원도 모르게 3천만원어치의 쌀을 건네주고 사라져 황당했다" 고 말했다.

동사무소가 트럭의 행방을 찾았지만 하루 임대된 차량이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산동네 사람들에게 익명의 도움은 처음이 아니다.

40대의 한 아주머니는 94년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1년에 두세차례 황조기 1백50두름(1천5백마리)과 휴지 2백만원어치를 사들고 다녀갔다.

지난 추석때도 들러 오는 설날에 다시 찾아오리라고 약속했다.

60대 가량의 한 할머니는 산동네에서 '장조림 할머니' 로 불린다.

지난 2월부터 매달 40㎏ 분량의 쇠고기 장조림을 전달하고 있다.

할머니는 "결핵엔 고기가 약" 이라며 손수 담근 장조림을 가구당 반근 정도씩 나눠줬다.

이젠 흔치 않은 연탄재가 흩어져 있는 산동네 골목을 휩쓸고 지나가는 세모(歲暮)의 바람은 결코 차갑지 않았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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