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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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6) 막강 레이저연구실

75년 11월 하순, 美국방부 고등연구국(DARPA)은 내가 몸 담고 있는 국방과학연구소(ADD)에 연구비 지원 결과를 최종 통보했다.

놀랍게도 1차 심사에 통과된 20개의 ADD 연구과제 가운데 레이저실에서 제출한 3개의 과제만 선정됐다.

정말이지 꿈만 같았다.

DARPA는 레이저실의 3개 과제를 하나로 묶을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이 연구과제를 '대기(大氣)의 광학(光學)적 특성에 관한 연구' 로 최종 이름지었다.

연구비 지원액은 총 20만 달러로 76~81년까지 모두 5개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였다.

그런 가운데 국방부도 우리 프로젝트에 1백만 달러를 연구비로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전례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연구비는 총 1백20만 달러, 그러니까 76년 당시 환율로 2억8천8백만원이라는 엄청난 거액이 됐다.

73년 5월 레이저실 신설 당시 연간 예산이 고작 5천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그것도 단일 연구과제에 그런 거액이 배정됐으니 우리들로서는 모든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DARPA로부터 최종 통보를 받은 날 저녁, 심문택(沈汶澤.98년 작고)국방과학연구소장은 '술 한잔 사겠다' 며 레이저실 연구원들을 소집했다.

시쳇말로 '기분이 째지게' 좋았던 것 같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沈소장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내가 당혹감을 느낄 정도로 칭찬했다.

"난 당신 처음부터 알아 봤어. 정말 대단해! 우리 앞으로 잘 해 보자구. "

처음 레이저실 실장에 임명하고서도 나를 못 미더워 하던 태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이날 모처럼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말없이 수고해 준 우리 연구원들이 너무 고마왔다.

바로 이들이 아니었던들 DARPA로부터 연구비를 따 내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76년 1월 초, 우리는 DARPA 프로젝트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말 그대로 '새해, 새 각오' 로 '새 프로젝트' 를 시작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특정 지역에서 날씨 변화에 따라 광(光)통신이 제대로 이뤄지는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를위해 직경 2㎞, 폭 1㎞의 평평한 지역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레이저나 적외선 등 광선(光線)을 일직선으로 나가게 하지 않으면 실험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광선의 변화를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도시처럼 조명이 너무 밝은 지역은 적합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장소를 찾아 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우리는 공군의 도움을 얻어 군용 헬리콥터로 전국을 샅샅이 뒤졌다.

무려 10여 차례나 전국을 순회했다.

비행 도중 위험한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갑자기 폭설(暴雪)이 쏟아지거나 세차게 바람이 몰아칠 때면 긴급히 비상 착륙을 해야 했다.

해가 진 다음에도 궂은 날씨가 계속될 때면 정말 막막했다.

이런 날은 하는 수 없이 인근 마을을 찾아 하룻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거의 한달만인 1월 말경, 마침내 우리가 원하는 장소를 찾아냈다.

안성군(현재는 안성시)공도면 '한독목장' 이 바로 그곳이었다.

60여만평의 넓다란 평원은 우리가 실험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마치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둔 '약속의 땅' 처럼 느껴졌다.

서둘러 실험실을 만들었는데 기껏해야 50평 짜리였다.

이어 광선을 쏠 수 있는 송신발진기(送信發振器)와 수신 안테나 등 각종 장비를 설치했다.

레이저실의 이덕훈(李德勳.60. 전 ADD 통신전자본부장)박사와 오성남(吳成男.51.기상연구소 응용기상연구실장). 김영준(金英俊.50.광주과학기술원 환경공학과 교수)연구원 등 6명을 이곳에 배치했다.

당시만 해도 외딴 곳으로만 여겼던 안성에서 장기간 머문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아무런 불평없이 내 결정에 따랐다.

한참 연구의욕이 넘쳐 있던 그들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만난 셈이었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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