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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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 글이 나에겐 이 지면에 싣는 20세기의 마지막 글이 될 것 같다.

따라서 머잖아 마감할 삶의 대부분을 그속에서 산 사람으로서 이 세기에 대한 회고가 없을 수 없다.

20세기란 우리에게 어떤 세기였던가.

나는 1차세계대전 패전 직후 막스 베버가 독일 대학생들 앞에서 현실세계가 아무리 바보스럽고 치사스럽더라도 어떤 사태앞에서도 "데노흐!" (dennoch!.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치에 투신해야 한다고 한 말을 지금 떠올리고 있다.

물론 20세기는 우리 민족사에 유례 드문 고난과 비극이 점철한 세기였다.

40년에 걸친 일제 식민지시대, 10년에 걸친 동족전쟁과 그 전후 시대, 광주의 대학살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의 10년에 걸친 참주(僭主)시대는 한국 현대사의 3대 재난이었다.

반세기 이상을 이처럼 빼앗기고 짓밟히고 피흘리고 억눌림을 당하곤 했으나 세기말의 고지(高地)에서 되돌아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는 한국인의 대세기(大世紀), 위대한 세기였다고 나는 믿는다.

독일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르프경(卿)은 제1세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들의 20세기를 "사회민주주의의 세기" 였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보다도 더욱 절실한 의미에서 제3세계 대다수 국가들의 20세기는 "삼민주의의 세기" 였다고 보고 있다.

민족.민권.민생을 추구한 중국혁명의 선구자 쑨원(孫文)의 삼민주의는 비단 중국만이 아니라 금세기초 제국주의의 식민지.반식민지로 전락한 제3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다같이 추구한 공통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침략의 군화(軍靴)소리속에 세기초를 맞았던 한국은 지금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OECD에 새로 가입한 국가로서 세기말을 맞고 있다.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진입한 한국은 삼민주의의 1차적인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셈이다.

그를 위해 우리는 광복후 반세기동안 3중의 어려운 혁명을 성취했다.

첫째는 40~50년대에 의무교육제를 전면적으로 상향 실시한 '교육혁명' 이다.

유엔이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개발의 연대' 로 설정한 지난 60년대에 제3세계의 개발원조 전문가들이 부닥친 가장 큰 어려움의 하나가 취학의욕, 취학률의 저하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광복이 되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학교문으로 몰려든 한국민의 높은 향학열.교육열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것은 뒤에 올 산업혁명.시민혁명의 대중적 지반을 마련해 '선(先)교육, 후(後)개발' 이라는 한국의 특이한 근대화 모델을 낳게 해주었다.

둘째는 60~70년대의 경제발전을 통해 이룩한 '산업혁명' 이다.

자원이라곤 인력(人力)밖엔 거의 아무것도 없는 최빈국이 두차례의 국제 에너지 파동을 겪으면서 선진국이 1백년, 2백년에 걸쳐 달성한 중화학공업국가로 한 세대 안에 탈바꿈했다는 사실은 이미 70년대 중반부터 외국의 옵서버들로부터 서독.일본에 이어 2차대전 후 세계가 경험한 '제3의 경제기적' 이라 평가되곤 했다.

한편 한국의 경제발전은 우리에게 일찍이 보지못한 세개의 숲을 선물해주었다.

공업화를 상징하는 공장굴뚝의 숲, 해양화를 상징하는 수출입 선박 마스트의 숲, 그리고 벌거벗었던 산을 새파랗게 뒤덮은 진짜 나무의 숲이 그것이다.

국제식량농업기구(FAO)는 한국(북한은 아님)을 19세기의 영국.독일.뉴질랜드에 이어 20세기에 녹화에 성공한 유일한 제3세계의 나라로서 세계 4대 조림국가로 꼽고 있다.

셋째는 80~90년대에 '시민 파워' 가 맨주먹으로 쟁취한 '민주혁명' 이라는 정치발전이다.

세계의 2백여 국가 가운데 자력으로 민주화를 이룩하고 평화적으로 정권교체를 성취한 나라는 열손가락으로 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일본과 독일도 자력으로 파쇼체제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패전에 의해 전승국의 강요된 선물로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나라들이다.

그러나 '쓰레기통에 장미꽃을 피우는 기적' 이란 민주화를 한국은 외국원조 없이 '국산' 한 것이다.

이러한 교육.경제.정치발전의 토대 위에 우리는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맞고 있다.

나는 21세기가 한국 문화의 제3의 중흥기가 되리라 내다보고 있다.

15세기 세종시대, 18세기 영.정조시대에 이어 다시 3백년 만에 되몰아치는 제3의 문화중흥기, 그리고 그것은 15세기 '대왕의 시대' , 18세기 '중인(中人)들의 시대' 에 이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동참하는 '시민의 시대' 가 될것이라고….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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