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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돔구장 건립, 더 이상 공수표 안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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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필자가 박사과정에서 수업을 들었던 찰스 알렉산더 교수는 미국 지성사의 석학이면서 동시에 야구 전문가이기도 했다. 『미국 야구사』와 『타이 콥(전설적인 안타제조기) 평전』 등 수많은 야구 관련 명저를 저술했다. 수업 중에 “야구의 인기와 문명의 정도는 정비례한다” “미국 문명의 쇠퇴는 미식축구의 인기가 야구의 인기를 능가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고 언급하자 야구를 하지 않는 나라인 영국 학생이 이의를 제기해 격한 토론이 이어졌었다. 두 가지 스포츠를 다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의 토론을 지켜봤던 기억이 새롭다.

축구는 이해하기 쉽고 가장 야성적인 구기 종목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제경기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반면 국내경기에서 압도적 인기를 얻고 있는 야구는 가장 지적(知的)인 구기 종목으로 룰이 복잡하고 경기 전개가 아기자기해 사전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세상에는 야구를 하는 나라가 많지 않다. 야구가 최근 올림픽 종목에서 탈락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한국인의 지적 수준이 높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야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올림픽 금메달, WBC 준우승에 이어 올해 프로야구는 정규시즌 최다관중 동원(592만 명)을 달성했다. 포스트 시즌도 성황리에 진행됐고(41만 명), 한국 시리즈도 7차전 명승부 끝에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성적과 상관없이 언제나 최고 인기구단인 롯데 자이언츠는 홈관중 동원 138만 명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타이거즈는 홈관중 동원이 58만 명에 그쳤다. 광주의 야구 열기가 부산만 못해서가 아니고 무등구장의 수용인원이 1만3000명밖에 안 돼 그런 것이다. 게다가 1965년에 건립돼 안전상의 문제도 있다. 다른 몇 개 구장의 상황도 비슷하다. 대구·대전구장도 협소하고 노후해 각각 1만 명밖에 수용하지 못하고, 안전진단에서도 B등급을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구장인 잠실야구장(82년 개장)은 아예 C등급을 받아 충격을 줬다.

WBC 이후 돔구장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돔구장에 익숙지 않았던 김광현이 굉음이 울리는 5만5000명 수용의 도쿄돔구장에서 난타당하는 모습은 애처로움을 느끼게 했다. 날씨와 상관없이 야구를 즐길 수 있는 돔구장이 건립된다면야 좋겠지만, 현실은 돔구장 이전에 낙후하고 협소한 구장을 대신할 번듯한 구장이라도 건립해야 할 상황이다. 미국 프로야구가 연 7000만 명대, 일본 프로야구가 연 2000만 명대의 고정관중을 갖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받쳐주는 인프라가 구비돼 있기 때문이다. 관중 600만 명대에 진입한 한국 프로야구는 거기에 어울리는 인프라를 갖추고, 일정한 고정관중을 확보해야 하는 숙제를 갖고 있다. 그러나 광주의 경우만 보자면 선거 때만 되면 새 구장 건립을 약속하고, 결과는 언제나 흐지부지였다. 광주시민들은 위대한 전통을 가진 타이거즈의 명성에 걸맞은 구장에서 야구를 즐겨야 한다.

포퓰리즘에도 좋은 포퓰리즘과 나쁜 포퓰리즘이 있다. 예를 들어 무안공항(이용률 2.5%)과 예천공항(완전 폐쇄)은 수천억, 수백억 예산 낭비의 전형이고 나쁜 포퓰리즘의 상징이다. 훌륭한 구장 몇 개를 건립하고도 남을 돈이다. 진정으로 시민들이 이용하고 즐기는 야구장을 건립하는 것은 제대로 된 포퓰리즘이다. 새 야구장 건립을 차일피일 미루며 수많은 야구팬의 행복권을 박탈하는 것은 정치공학적인 측면에서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한국야구는 합당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지 않은가. 광주에 돔구장을 건설한다는 발표가 또 있었으나, 아직은 MOU 수준이라고 한다. 이 약속이 예전처럼 공수표가 안 되기를 바랄 뿐이다.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