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훈수 제대로 받는 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장기나 바둑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 중 하나가 훈수다. 훈수 한 번으로 판세가 역전되거나, 심지어 판이 끝나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흥미로운 건 판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훈수를 한 사람이 반드시 고수는 아니라는 점이다. 옆에서 지켜볼 때 길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이런 경우는 비단 게임에서만 있는 게 아니다.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위기의 순간이나 전환기를 맞아 남의 머리를 빌려야 할 때가 있다.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그러자고 하는 게 컨설팅이다. 컨설팅 업체가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나서가 아니다. 안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밖에서 더 잘 볼 수도 있고, 컨설팅 업체가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통해 해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어서다. 그래서 1990년대 말 미증유의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금융회사·기업 할 것 없이 줄이어 컨설팅 업체를 찾았다. 아마도 한국에서 전문 컨설팅 업체들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시기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많은 이들은 컨설팅이 요술방망이처럼 문제의 정답을 가져다줄 것이란 기대를 했던 것 같고, 그런 생각은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 듯하다.

그러나 막상 컨설팅을 받은 후에는 시간 낭비만 했다거나, 너무 이론적이고 교과서적이다, 혹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반면에 컨설팅 결과가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져 큰 변화를 일구어 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올까.

필자의 과거 경험으로 볼 때 컨설팅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어우러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오픈 마인드이어야 한다. 컨설팅 업체를 불러들이면 흔히들 그들의 답을 가져오라는 요구부터 한다. 심지어 자신들의 정보는 전혀 내놓지 않고 답만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환자가 의사의 진료를 제대로 받기 위해서는 병증을 충분히 얘기해야 하듯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현상, 자료들을 100% 제공해야 컨설팅 업체도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최상의 인력과 자료를 제공하면서 최고경영자는 그들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둘째로, 귀는 기울이되 판단은 내가 한다는 것이다. 컨설팅은 자동차로 치면 내비게이션에 비유할 수 있다. 내비게이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길을 찾아주며 다양한 길 중에서 자신이 판단하기에 최적의 길로 안내한다. 그러나 그 길이 늘 최선은 아니다. 가다 보면 막히는 길일 수도 있고, 비좁고 굴곡진 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안내를 참조하되, 어떻게 갈지는 본인이 판단해야 한다.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받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자면 최고경영자가 컨설팅 결과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현실성이 있는지, 무엇에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는 결국 그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판단이 서면 실행해야 한다. 기업들이 컨설팅 보고서를 받은 뒤 거창하게 발표해 놓고는 곧장 서랍 속에 집어넣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건 이벤트이지 컨설팅이라고 할 수 없다. 의욕적으로 뭔가 하려 했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내부 저항이나 성장통을 이기지 못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아무리 잘된 컨설팅이라도 실행이 따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성공은 코치의 지도를 받아 성실히 수행할 때 가능하다. 김연아 선수가 피겨의 여왕으로 등극한 건, 브라이언 오서 코치의 조언과 지도를 땀과 눈물을 흘리며 소화해 냈기 때문이다.

컨설팅은 크게 보아 두 가지 가치를 가져다준다. 하나는 내가 몰랐던 사실을 가르쳐 준다는 점이다. 선진 사례나 경험으로, 곧 벤치마킹할 소재다. 또 하나는 구슬은 있지만 조직 내 이해관계 등으로 꿰지 못하고 있을 때 제3자 시각에서 객관적 해결책을 던져주는 것이다.

바둑에서 훈수꾼이 결정적 훈수를 할 수 있는 것은 외부에서 넓게 보기 때문이다. 컨설팅이 바둑판의 훈수와 다른 점은 대국자가 훈수꾼과 하나 되어 오픈 마인드로 문제를 공유하면서, 함께 다음 착점을 찾고 수순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위기를 극복하고 변화 성과를 이뤄내는 게 반드시 컨설팅을 통해서만 가능한 건 아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훈수를 받으면 열린 마음으로 제대로 받고, 옳다고 판단되면 실행에 옮기는 자세를 갖자는 것이다. 공공기관이든, 기업이든, 학교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이 쉬 고쳐지지 않는 까닭 중 하나는, 이유가 어디에 있건 올바른 훈수도 받아들이길 꺼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