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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마다 ‘햅쌀 누보 막걸리’ 내놓겠다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4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한 ‘싸롱 마고’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대생부터 의사·요리사·주부·교사·와인 소믈리에까지 40여 명에 달했다. 연령도 20~60대까지 다양했다. 그들은 2층 높이의 높다란 천장 아래 5개의 테이블에 나눠 앉았다. 테이블 뒤편에는 몇 가지 음식과 다양한 종류의 막걸리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막걸리학교’ 강좌를 듣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첫 대면에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군데군데서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마냥 술이 좋아서, 술이 궁금해서, 술을 잘못 마셔서…. 강의를 들으러 온 목적은 제각각이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암에 걸렸었다는 한 학생은 “완치되고 나니 술 생각이 나는데 건강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막걸리를 알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막걸리학교는 문화교육단체인 인문학습원에서 개설한 강좌로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8주 동안 진행한다. 수강료는 25만원이며 막걸리의 역사, 막걸리 빚기 실습, 맛 지도 그리기, 막걸리 장인과의 대화, 막걸리의 경제학 등 막걸리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룬다. 8주짜리 강의이지만 ‘학교’란 이름에 걸맞게 모양새를 갖췄다. 강의를 진행하는 스태프들은 교장·교사·교생 등으로 불렸다. 학생들도 가슴에 이름표를 달았다. 시간이 되자 교장을 맡은 술 품평가 허시명(46)씨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 강의를 통해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막걸리의 양적 팽창이 질적으로 승화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며 “우리 술 문화가 빈약한데 술을 마시되 격을 갖추고 즐겁게 마시는 법을 알아보자”고 막걸리학교의 의미를 설명했다. 학교라는 이름에 맞게 교칙도 정했다. 술을 공부하는 학교 특성을 감안해 음주운전하다 적발되면 곧바로 퇴학시키는 조항도 있다. 술을 마시되 지켜야 할 것은 꼭 지켜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지각하면 벌주를 마셔야 하지만 학생들은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매시간 술자리를 준비하고 정리하기 위한 주번과 반장도 뽑았다. 졸업 작품으로는 직접 빚은 막걸리를 제출하기로 했다.

강좌에 관한 소개가 끝나고 첫 시간 수업이 시작됐다. 막걸리의 역사에 관한 강의였다. 고대 문헌에 나오는 관련 자료부터 막걸리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 그리고 80년대 이후 급격히 힘을 잃은 막걸리의 역사를 되짚었다. 학생들은 필기를 하며 경청했다. 수업 중 학생들이 특히 관심을 보인 것은 막걸리학교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였다. ‘햅쌀 누보 막걸리’란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막걸리를 이용해 한국형 보졸레 누보를 만들어 보자는 계획이다. 막걸리학교에서는 보졸레 누보가 매년 갓 수확한 포도를 사용해 만든다는 점에 주목해 그해 갓 수확한 햅쌀로 막걸리를 만들어 매년 일정한 날에 출시한다는 것이다. 이 행사를 통해 막걸리를 세계에 알리고 우리 쌀 소비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한 시간의 이론 강의가 끝나자 막걸리 시음이 시작됐다. 술이 나오자 조용하던 카페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준비한 여섯 종류의 막걸리를 번호가 적힌 커다란 유리병에 부어 종류를 모르는 상태에서 맛을 평가해 보는 시간이었다. 안주는 막걸리와 잘 어울리는 보쌈김치와 해산물이었다. 학생들은 색상과 탁도·향기·맛 등으로 항목이 나뉜 막걸리 평가표를 받았다. 처음 해보는 막걸리 품평에 신기해하며 진지하게 임했다.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감은 채 조심스럽게 맛을 음미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한입에 벌컥 다 마시고 평가하는 학생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매주 5~6종류의 막걸리중 하나의 술을 뽑고 마지막 시간에는 그동안 뽑은 술들을 모아 최고의 술을 선정하기로 했다. 술잔이 돌면서 첫 수업의 어색한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졌다. 학생들은 술을 서로 권하며 금세 친해졌다. 전진석(49·농업)씨는 “전국을 돌며 막걸리 맛을 보고 싶은데 시간도 돈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한자리에서 다양한 막걸리 맛을 볼 수 있어 행복하다”며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수업 종료 시간 9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끝이 났다. 허시명 교장은 와인의 예를 들며 “술은 문화와 어우러져야 감동이 있는 것”이라며 앞으로 “막걸리에 국한하지 않고 청주나 소주 등 우리 술문화 전반으로 수업의 범위를 확장할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임현욱 기자 g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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