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뉴라운드와 미국의 이중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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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산 철강제품은 바로 미국의 힘이다" "WTO가 미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뉴라운드 협상회의 개막식을 취소케 만든 5만여명의 NGO 시위대 속에는 이런 구호를 내건 미국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소속 노조원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말이 NGO 시위지 그야말로 전세계 협상대표단들에게 미국 노조의 힘을 과시한 현장이었다.

개막식장 주변까지 밀고 올라가 인간사슬을 엮고 행사에 참여하려는 대표단들에게 몸싸움을 벌이며 공격적인 태도로 출입을 막는 모습은 여기가 '자유의 나라 미국' 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다국적기업을 규탄하며 해외공장이 많은 나이키사 건물에 난입한 시위대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는 코미디 같은 모습도 연출됐다.

68년 월남전 반전데모 이후 처음으로 시위군중에게 최루탄과 고무총탄이 발사되고 2차 세계대전 후 30년만에 통행금지가 실시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뉴라운드 협상은 개시됐다.

그러나 일부 국가들은 이번 시위가 미국 정부의 '방조' 아래 협상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무어 WTO 사무총장도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시위대들의 주장에 공감한다" 며 이번 협상에서 시위대가 주장하는 노동조건이 미흡한 나라의 제품에 무역규제를 가하는 '노동과 무역' 이 의제로 채택돼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회의 주최국인 미국이 이처럼 자국의 이해를 앞세워 힘의 논리를 펼치는 모습은 그동안 '글로벌 스탠더드(국제기준)' 를 강조하며 무역자유화를 내세우고 개도국 시장의 빗장을 열라고 몰아세우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관제성(官制性) 시위 분위기 속에 밀어붙이기식 협상태도를 보이고 있는 미국의 이중성(二重性)을 지켜보며 WTO체제의 앞날이 어둡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시애틀에서

홍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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