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 '오랏줄'의 반인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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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757년 3월 2일 프랑스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다미앵이란 시종무관에게 다음과 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처형대 위에서 가슴.팔.넓적다리.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집게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 "

읽기에도 끔찍한 이 내용은 감옥과 감시의 체제를 분석해 권력의 정체와 전략을 파헤친 미셸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 (오생근 역)첫 머리에 인용된 잔혹한 형벌의 한 보기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기록을 보면 온몸을 토막내는 능지처참(陵遲處斬)에서 삶아 죽이는 팽형(烹刑), 살을 깎아 죽이는 박피형(剝皮刑)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도록 많은 잔혹하고 기괴한 처벌들이 실제로 자행됐다.

동.서양이 또 공통적인 것은 잔혹한 형벌일수록 대중에게 널리 그 집행을 공개했다는 점이다. 형벌은 절대권력이 피지배자들에게 위력을 과시하고 공포심을 심어줘 저항의지를 꺾는 정치의식이었기 때문이란 것이 푸코의 해석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시대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일까. 지난 16일 옷값 1억원의 대납을 요구한 혐의로 그 전날에 긴급체포돼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나오는 정일순(鄭日順)씨는 미결수복에 수갑을 찬 뒤 또 오라에 묶인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TV를 통해 그 모습을 보았겠지만 거부감을 느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옷로비 사건은 많은 국민을 분노케 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으레 미결수들은 수인복(囚人服)에 수갑을 차고 오라에 꽁꽁 묶여 왔다. 그러나 필자는 과민한 탓인지 몰라도 미결수가, 그것도 여성이 수인복에 수갑을 차고 거기에다 오라까지 지워져 대중 앞에 회돌려지는 모습에서 저 잔혹시대의 그림자가 아른거림을 느꼈다.

행형법(行刑法)에는 포승과 수갑은 '수용자의 소요.폭행.도주 또는 자살의 우려가 있는 자와 호송 중의 수용자' 에게 사용할 수 있게 돼 있다. 수갑이면 충분하지 왜 또 오라일까. 행형관계자들에 따르면 수갑만으로는 안심을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갑을 기술적으로 따고 도주했던 사건이 몇차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수갑에 포승을 지우는 행위가 실제로 하나같이 그런 가능성을 예상했기 때문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저 그것이 규칙화된 관행이기에 피의자나 피고인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갑으로 손을 묶고, 오라로 옭아매는 것일 것이다. 강력범죄의 피의자라면 모르겠다.

그러나 여성피의자가 과연 수갑을 끊거나 따고 도망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이는 결코 하잘것없고 사소한 것의 문제이지 않다. 나치가 패망한 뒤 독일의 지식인들이 세미나를 열었다.

도대체 칸트.헤겔의 나라, 베토벤의 나라가 나치시대를 겪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도깨비에 전 국민이 홀렸단 말인가. 결론은 언뜻 사소하게 보이는 주위의 불의와 모순들을 그때 그때 시정하고 제거하지 않고 지나쳐버린 탓이라는 것이었다.

요즘 이근안이 붙잡혀 지난날의 악몽인 고문 문제를 되새김할 기회를 갖고 있다. 다행스런 일이다. 이근안의 체포를 우리 사회가 고문과 영원히 결별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근안이나 그 배후세력을 처벌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법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근본적으로는 고문이 자행될 수 있는 토양과 분위기를 없애주어야 하며 그러려면 아주 작은 반인권적 행위나 제도도 결코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는 시민의식이 형성돼야 한다.

작은 인권보호가 곧 큰 인권의 보호인 것이다. 돈 많고 기세가 등등하던 사람도 수인복을 입히고 수갑을 채우고 오라까지 지워져 대중 앞에 내세워지면 초라해 보이게 마련이다.

확정판결 전에는 무죄로 추정되는 것이 대원칙이다. 또 설사 유죄가 거의 분명하고 옷로비 사건처럼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건의 피의자라 할지라도 필요 이상으로 신체적 억압을 가하고도 무감각하고 거기에서 오히려 심리적 쾌감을 느끼는 가학적 사회라면 우리는 푸코가 보기로 제시한 시대상에서 그리 멀리 와 있지 않은 셈이다.

"사상의 자유는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 이다. 마찬가지로 인권보장도 단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의 인권만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의 인권도 보장하는 것을 뜻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문명 사회의 기본요건일 것이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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