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65.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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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43)

술자리는 금방 썰렁해지고 말았다. 한철규가 파하고 일어설 채비를 하였다.

"철규 형님 기분 잡쳤지요? 딴데가서 한 잔 더 걸칩시더. "

"바다 구경이나 하지. "

"동해나 서해나 그기 그기지 별개 있겠습니껴. "

"이상해. 바다가 내 체질에는 맞지 않는 것 같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가도 바다만 보면 가슴이 뛰고 싱숭생숭해서 자제력을 잃게 돼. 승희가 곁에 있을 땐 그 여자를 느끼지 못했었는데 없을 때는 간절하게 느끼게 되는 심사는 뭔지…. 꼭 바닷가에만 오면 잊어버렸던 생각들이 흡사 새 주화처럼 머릿속에서 반짝거리며 되살아나는 까닭을 모르겠어. 이제 승희가 있으면 내 삶도 새 주화처럼 빛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게 바다야. "

북적거리는 식당을 나선 세 사람은 이제 불빛들이 사라져가는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착장 난간에 나란히 섰을 때, 손달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식당에서 손씨가 왜 울었는지 형님은 짐작하겠습니껴?"

한철규의 시선은 먼데 머물러 있었다.

"봉환이는 알고 있어?"

"내가 모르이, 형님한테 묻는 거 아이겠습니껴. " 그러나 한철규는 그 말에는 대꾸를 않고 말머리를 슬쩍 돌렸다.

"우리 두 사람 맨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 그날 밤 한계령에는 지척을 분간 못할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지. 먼 거리를 혼자서 야간운전을 해야 할 봉환이는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한껏 조롱하고 면박주던 걸 잊지 않고 있어. 그때 봉환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 주제를 꾸짖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도 다시 서울로 되돌아가 서울역이나 종묘 어디에서 지금까지 노숙자 생활을 계속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을거야. 그때 내가 발견한 봉환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처럼 무서운 것을 모르는 사내였어. 나한텐 신선하고 신기할 정도였지. "

"형님 또 와이카십니껴. 오늘은 형님이 야간비행기 태울라 캅니껴?"

"농담하자는 게 아니야. 생각하면 객지생활하면서 변선생을 비롯해서 은혜 입은 사람들이 한두사람이 아니었어. 고흥 방극섭씨 알지? 그 방형한테도 폐를 많이 끼쳤어. 우리 일행과 동행하면서 전혀 이해관계를 따질줄 모르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이제와서 애타게 보고싶고 그리운 사람은 승희 한사람뿐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인제 보이 형님도 자기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 놓을 줄 아는 사람이네요? 형님 할 수 있는 일 중에 돈벌이밖에는 맹물이거나 목석인줄 알았습니더. 어찌 됐든간에 속내를 속시원하게 털어 놓는 걸 듣고 있을라카이 나도 눈물이 쑥 빠질라 카니더. 가슴 속에 끼여있던 찌끄레기도 싹 청소가 되는 것 같아서 홀가분하기도 하고요. "

"손씨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것도 그처럼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흘린 눈물일거야. "

"알만 합니더만 그럼 형님을 우짤라 캅니껴? 승희씨를 찾아야 안되겠습니껴. 사실은 나도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이시더마는 내가 찾는답시고 설쳐대면 말 많은 세상에 또 무신 오해라도 생길까 가슴이 오민조민해서 일부러 관심 없는 척 해왔거든요. 그런데 형님의 심정이 그마이 간절하다카면, 명색이 동기간인 내 처지에 가만 있을 수 있겠습니껴. 사흘 뒤에 또 웨이하이(威海)로 떠나야 되는데 그때 물건 빨리 처분하고 승희씨를 본격적으로 찾아볼까요□ 북한 사람들 식으로 형님이 명령만 하이소. "

혹할 것 같았던 한철규는 그러나 대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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