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60.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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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38)

농협수매가 끝난 지도 이미 오래 전이었기에 농가에서 내놓을 수 있는 매물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대신 한물 출하가 지난 뒤였기에 중간상들이나 단골상회의 텃세나 협잡꾼들의 농간에 곤욕을 치르지는 않았다.

원래 급전이 필요할 때 내다 팔거나 자가용으로 갈무리해 두었던 매물들은 거개가 상품들이었다.

그것이 바로 틈새시장을 헤집고 다니는 상인들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틈새시장에는 한해 농사를 마무리한 농민들의 허탈감이 배어 있게 마련이었다.

농우 사라고 대출해 준 대부금으로 무쏘 사서 몰고 다닌다는 말은 있지만, 농사 지어서 대처에 나가 있는 혈육들 치다꺼리 하다 보면, 원래 굽은 늙은이들 허리는 콧등이 땅에 쓸리도록 휘기만 했다.

등뼈가 휘도록 농사를 지어도 빚은 해를 거듭할수록 밑빠진 독처럼 늘어만 가고, 예측하지 못했던 급전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불쑥불쑥 고개를 디밀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씨네는 그들이 부르는 수매가격에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것이 숨어 있던 매물들이 흘러 나오도록 유인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한 장도막이 지날 동안 두 트럭 분의 고추를 도매상회에 넘기게 되면서 정읍 고추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도매상들도 한씨네의 장사 수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시골 아낙들의 비위를 맞춰 주는 수완이나 물건을 고르는 눈썰미는 지난날의 승희만큼 매끄럽지는 못했다.

어쨌든 두 장도막 동안 모두 다섯 트럭 분의 고추를 매수하는 데 성공했고, 도매상회에 넘겨 준 뒤 계산해 본 이익금도 방극섭 아내가 항상 남편에게 졸라댔던 번듯한 옷장 하나는 들여놓을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이제 그와 헤어질 시간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2년 전 서울을 떠나온 이후, 장마당을 뒹굴면서 한철규와 인연을 두었던 사람들의 수효는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았지만, 방극섭과 헤어지는 순간이 가장 가슴 쓰리게 느껴졌다.

방극섭도 마찬가지였다.

한철규와 형식의 거동에서 정읍장을 마지막으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차마 먼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날 밤 형식을 먼저 숙소로 들여보내고 주점으로 자리를 옮겨 둘이서만 마주 앉은 자리에서도 방극섭은 내내 울적한 얼굴이었다.

"내일이면 방형은 고흥으로, 우리는 또 어디로 훌쩍 떠나야 하겠지만, 우리 행중이 고흥에 기거하면서 방형에게 입은 은혜는 조금도 보답을 못하고 떠납니다. 방형을 만나고 나서야 내가 어딘가 정착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

"나가 할 말을 사돈이 하고 있어라. 손바닥만하게 좁은 나라에서도 언제 다시 만나자는 언약은 지키기 쪼까 어렵겠지요이?"

"정착을 하게 되면, 방형을 찾아 갈 수도 있고 방형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나도 궁금한데 지금 약속을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형식이란 놈이 저질러 놓았다는 짐까지 방형께 훌쩍 떠넘기고 떠난다는 것이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정말 뭔가 일을 저질러 버렸다면, 그런 낭패가 없겠는데…. "

"그러지요. 낭패이긴 합니다만, 그 일로 해서 형식이가 고흥을 들락거리게 되면 한선생과도 연락 두절되지 안컸지요이. 나가 쪼까 생각해 보니까,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다는디, 바로 그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모르겄네요이. "

"형식이가 아직은 결혼식을 올릴 처지는 아니지만, 사귀는 처녀와의 사이가 진실된 것이라면 함부로 꾸짖을 수도 없겠지만, 타이른다고 먹혀들기나 하겠습니까. 내가 부추기지 않더라도 처녀를 만나기 위해서 고흥으로 달려가는 일이 빈번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방형이 처녀가 누군지 알아내서 지켜봐 주는 것도 좋겠지요. "

그날 두 사람은 억병으로 취하도록 마셔 댔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겨우 깨어난 것이 오전 9시쯤이었는데, 방극섭은 장황한 이별이 싫었던지 이미 고흥으로 떠나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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