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화약고'대학실험실 안전무방비 여전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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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달 9일 서울대 화학과 실험실. 대학원생이 시약병을 떨어뜨리면서 치명적인 포스겐 가스가 실험실 내로 퍼져나갔다. 위기상황이었지만 다른 방에 있는 학생들은 태연히 실험을 계속했다. 경고를 알리는 아무런 조처도 없었기 때문.

서울대 실험실 폭발 사망사고 이후에도 대학 실험실 안전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당사자인 대학은 물론 교육부에서 취한 조치는 안전교육을 권고하고 위험물질 보유 상황을 파악하도록 지시한 것이 고작.

서울대 대학원생 N씨는 "대학 실험실 사고는 연례행사처럼 반복되고 있지만 학교측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며 "최근 3명의 동료를 앗아간 원자핵공학과 폭발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련의 안전사고 중 운이 나쁜 경우에 불과할 뿐" 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에서 탄환추진 실험 중 발생한 연소관 폭발사고, 자연대 화학과 실험실 전체가 불탄 사건, 심야에 실험실에 들어가던 대학원생의 추락사고 등 매년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되풀이되지만 이에 대한 예방책은 구호에만 그친다는 것.

지난달 25일 서울 A대 화공학과 실험실. 출입구에 소화기는 없고 표지만 덜렁 붙어 있다. 단단히 고정시켜야 할 고압가스통은 아무런 조처없이 방치돼 넘어지거나 외부 충격 때 폭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비상구는 고사하고 출입문 중 하나는 아예 '폐문' 이라고 써 놓은 뒤 장비로 막아놓았다. 비좁은 공간에 염산.황산 같은 맹독성 약품이 높은 선반에 비치돼 아차하면 떨어질 위험도 안고 있었다. 게다가 가운과 장갑을 착용하지 않은 학생들이 많아 안전의식 부재도 드러났다.

본지 취재팀이 연구 규모가 큰 6개 대학원 실험실 50곳을 대상으로 안전수칙을 긴급 점검한 결과 실험 도중 기억에 남을 사고를 당한 학생이 25%, 사고 위험을 느끼고 있는 학생은 50%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출입문 외 비상구를 둔 곳은 아예 없었고, 화재시 작동해야 할 스프링클러가 없는 곳이 70%, 유해가스 배출용 후드가 작동하지 않는 곳도 33%나 됐다.

특히 실험대를 닦은 휴지 등은 검은 비닐에 담겨 일반 쓰레기와 함께 처리돼 환경 오염원이 되고 있었다.

지방 B대학 공대 대학원생 강모씨는 최근 실험실 동료가 전기톱으로 목재를 절단하던 중 손가락 일부가 잘려나가는 사고를 목격했다. 그는 동료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 봉합 수술을 받게 한 뒤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치료비를 물었다.

학교에는 보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 부서를 찾아가야 할지 몰랐고, 지도교수나 학과 사무실에 얘기해 봐야 돌아올 답이 뻔하기 때문" 이라는 것.

현재 전국에 실험실 안전과 관련, 전담부서를 둔 대학은 서울대(환경안전연구소)와 충남대(환경문제연구소)두 곳뿐. 이마저도 연구소로 분류돼 안전교육 수준에 머물 뿐 인력 때문에 실험실 점검은 엄두도 못낸다. 충남대의 경우 소장과 행정직 1명이 전부. 예산이 없어 안전교육도 올해 처음 실시했다.

실험실 안전은 건물 설계단계부터 무시된다. 96년 완공된 서울대 신공학관. 교수들은 이를 두고 '오피스텔' 이라고 혹평한다. 실험실마다 별도 환기시설이 없고 전기배선도 일반 사무실용으로 깔아 놓았다.

화재에 대비한 전원 차단기도 층마다 하나밖에 없어 최근 교수들이 실험실 단위로 설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후드도 아예 없다가 교수들의 항의로 10층과 11층에만 추후 설치했다.

공대 모 교수는 "현재 건설 중인 제2신공학관도 1관과 크게 다르지 않게 설계됐다" 고 우려를 나타냈다.

고종관.이영기.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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