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5. 소설 - 윤대녕 '고래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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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나의 아버지 '그'는 남들과 반대로 주먹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펴가며 셈을 한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셈이지만 복(福)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학교 선생을 하던 그는 어느날 아내에게 간단한 짐을 꾸리게 한 뒤 나들이 가듯 훌쩍 고향을 떠났다. 그의 아내는 나중에야 그게 이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ㅇ시에서 그는 투계(鬪鷄)장을 차려놓고 미군들을 끌어들였다. 미군들이 놓고 간 위스키.초콜릿.고체 우유 등이 수입이 됐다. 이후 그는 싸전.문방구점.음식점 등을 전전하다 훗날 수퍼마켓으로 발전한 잡화점을 차리고서야 자리를 잡는다. 고래등은 손재주 있는 그가 투계장 시절 고래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처마 밑에 걸었던 외등이다. 아내는 이사갈 때마다 잊지 않고 챙겨 새 근거지에 걸어놓곤 했다. 칠순을 넘긴 그는 번듯한 양옥 한채를 나에게 공개한다. 제대로 된 집 한칸은 가족 모두의 소망이었다. 양옥집 처마 밑엔 예의 고래등이 걸려 있다.

<'작가세계' 2004년 봄호 발표>

◇ 약력
-1962년 충남 예산 출생 -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96년 이상문학상, 98년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고래등'

소설가 윤대녕씨의 '고래등'은 황순원문학상 2심 심사에서 "가족사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아내 밀도가 높은" 작품 중 하나로 거론됐다.

정작 윤씨는 "부담스럽다"며 "전적으로 자전적인 소설로는 읽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제주시 한라수목원 근처에 있는 지금의 작업실로 옮기기 전 북제주군 애월읍에 있던 작업실 인근에 잘 지어진 집 몇 채가 있었다"고 소개했다. "가끔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번듯한 빈집에 잠시 머무르다 가는 노인을 그때 목격했다"는 것이다. 소설에는 시내에 살림집을 따로 두고 외곽에 지어 놓은 별장 같은 큰 집에 가끔 쉬러 오는 노인이 등장한다. 결국 "자전적 경험 반, 픽션 반 정도로 보면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윤씨는 "한 남자의 인생에서 말년에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소설 속 '그'의 경우처럼 빈집 한채 달랑 남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을 써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아버지와 아들 간이 단절된, 세대 간 갈등을 자연스럽게 섞어 넣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했다.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다소 급작스럽게 풀리는 것 아니냐"고 질문했다. 그는 "화해의 실마리를 남긴 정도"라고 답했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씨는 "그동안 윤대녕의 작품들은 어떤 문학상 후보로 올랐다고 해도 별 말이 없을 정도로 태작이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로, 아주 아름답고 시적인 대목도 눈에 띈다"는 것이다. 김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윤씨가 비판의 도마에 올랐던 것은 대표작 '은어낚시통신' 이후 비슷한 얘기들이 반복돼온 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작품은 변화의 지점들이 보인다"고 김씨는 평했다. 김씨는 "나이 든 때문인지 현실이 등장하던 초기작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역마살이 낀 듯한 윤씨 소설 특유의 주인공은 이번 소설에서 집과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평가했다.

공교롭지만 윤씨 스스로도 변화를 얘기했다. "1990년대의 감성적.이미지적 글쓰기에서 조금씩 리얼리즘 쪽으로 옮겨가는 과정인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차츰 사회적인 문제에도 눈을 돌리고 싶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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