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조영암 '허 42' 전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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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릉 푸른 골짝에

안개 자욱이 내리고

꽃밭처럼 환한 산비탈

사슴 두어마리

한창 교미에 황홀한 즈음

내 급작스리

생명의 신비한 충격

온몸에 잦아들어

드디어 어린 놈들은

사탕발림하여 밖으로

내쫓은 다음

한쌍 사슴처럼 생명작약의

대신비경에 들었거니

하늘은 우리들 슬기로운 지애비 지어미를 위하여

꽃비조차 소슬히 내리시고

두어방울 고운 땀방울이

흰 구슬 되어 아내의 이마 위에 솟고

내 드디어

불가사의에 침잠한 채

깊은 오수에 빠졌더니라

- 조영암(81) '허 42' 전문

어찌 시가 쓰라리기만 하리. 이렇듯이 열락을 노래함에 자못 가만히 웃음짓지 않을 수 없어라. 정릉골짜기에 사슴이 나오던 시절이 그 언제더뇨. 더욱이 그런 사슴의 황홀한 교미를 배워 아이들 내보내고 대낮에 한바탕 육체의 향연이 있었으니 자연으로 살고 자연으로 죽는 큰 길이 여기 있다. 어떤 주장에는 섹스도 선(禪)이라 했다. 아무튼 허허 큰 일을 마친 뒤의 깊은 잠 그 경지가 무릇 깊으나 깊은 또 하나의 황홀경 아니리. 80옹 시인이여 부디 강녕하시길.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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