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제표준 확보가 기술 경쟁력의 지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6면

세계 산업계에는 “우수한 기술을 많이 쓰는 게 아니라 많이 쓰는 기술이 우수하다”는 격언이 있다. 그만큼 국제표준이 중요하다. 국제표준을 확보하지 못하면 단순 제조국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전 세계가 표준 규격을 둘러싸고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제표준은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가져다 준다. 어느 기업이라도 표준에 따라 제품을 만들려면 로열티를 내고 표준 특허를 이용해야 한다. 예를 들면 국내 기업들은 1995년 이후 수조원의 로열티를 주고 미국 퀄컴에서 휴대전화 칩을 사들여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와이브로 휴대인터넷 기술이 국제표준이 되면서 머지않아 이런 설움을 씻게 될 전망이다.

지난 주말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개발한 모바일 디지털TV 기술이 미국의 기술표준으로 채택됐다는 반가운 뉴스가 전해졌다. 치열하게 경쟁해온 두 회사가 함께 글로벌 시장을 뚫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새롭다. 이제 북미 지역에서 휴대전화를 통해 TV를 시청할 경우 반드시 삼성과 LG가 만든 수신칩을 쓰거나 기술 특허료를 내야 한다. 같은 시각 국내 터치폰에 사용되는 20핀 방식의 휴대전화 충전 방식도 국제표준으로 채택됐다고 한다. 새로 휴대전화를 살 때마다 충전지와 충전 방식을 모두 바꾸어야 하는 불편이 사라지게 됐다. 이처럼 국제표준은 기업에는 시장 지배력을, 소비자에겐 편리함을 가져다 준다.

국제표준은 기술 경쟁력의 척도이자 기업의 생존수단이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이 이런 사실에 눈뜬 것은 불과 10년 전이다. 다행히 국제표준 제안 건수가 2001년 7건에서 지난해 212건으로 크게 늘어났고, 구체적인 과실들도 하나둘씩 거두고 있다. 우선 와이브로에 이어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시킨 지상파 멀티미디어방송(T-DMB) 기술도 국제표준이 됐다. 최근에는 우리 조선업계가 제안한 16건의 선박 계류장치가 국제표준에 올랐고, 국내에서 개발한 서비스 로봇의 안전과 성능 측정 기술도 국제표준이 됐다. 한국이 뒤늦게나마 국제표준회의를 유치하고 세계 규격기구에 진출하기 위해 공을 들인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국제표준기구들이 최근 범용기술보다 선도기술 쪽에 관심을 두면서 선진국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유럽연합(EU)은 연구개발(R&D) 비용을 지원할 때 기술표준화 계획서를 함께 요구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도 국가 차원의 종합전략을 마련해 세계 표준이 될 싹이 있는 쪽에 연구자금을 집중 배분하고 있다. 더 이상 기술의 우수성만 갖고는 국제표준을 노릴 수 없는 냉엄한 현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비디오플레이어 표준 경쟁에서 일본 소니는 기술 하나만 믿고 베타 방식을 고집하다가 VHS 진영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도 정부와 기업이 협력해 국제표준을 염두에 두면서 기술개발에 착수하고, 각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우호진영도 튼튼하게 구축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