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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음식 덕, 한국 와인 문화 빨리 자리 잡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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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호 08면

프랑스 와인회사 ‘바롱 필립 드 로칠드’의 아시아 지사장 안토니 구르멜. 이 회사는 보르도 지방의 5대 샤토(와인 생산 시설을 갖춘 포도농장)로 꼽히는 무통 로칠드에서 출발했다. 신인섭 기자

“한국은 참 독특하고 흥미로운 시장입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일본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예요. 한국은 와인을 본격적으로 마신 것이 최근 10년 정도인데도 와인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가 놀랍도록 빨리 발전했어요. 아시아에서 이런 곳은 유일무이합니다. 중국 시장도 급성장 중이지만, 한국처럼 와인을 판별하기보다는 ‘비싼 와인=좋은 와인’이라고 여기죠.”

프랑스 와인 명가 ‘바롱 필립’, 한국서 ‘무통 로칠드 갈라’

세계적 와인 명가 ‘바롱 필립 드 로칠드’(이하 바롱 필립)의 아시아 지사장 안토니 구르멜(34)의 말이다. 일본에 거점을 둔 그는 13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무통 로칠드 와인 갈라’를 위해 내한했다. 행사에 앞서 중앙SUNDAY와 만난 그는 한국에 와인 문화가 빠르게 자리 잡은 원동력으로 음식을 꼽았다. “한국 음식은 맵다고들 하죠. 그렇지만 너무 기름지거나 무거운 맛이 아니에요. 이런 음식 덕분에 한국인의 입맛이 발달돼 있어서 프랑스 고급 와인의 진가도 금방 아는 것이라고 봅니다.” 와인과 잘 어울리는 한국 음식으로는 불고기를 들었다. “불고기의 단맛은 칠레 와인과 잘 맞아요. 몇 년 전 일본에서 칠레 와인을 새로 출시하면서 일본 내 불고깃집을 주요 타깃으로 삼기도 했죠.”

바롱 필립은 프랑스 와인 명산지 보르도의 5대 샤토로 꼽히는 무통 로칠드에서 생산하는 최고급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는 물론이고 이보다 한결 대중적인 브랜드 ‘무통 카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기술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일찌감치 유럽 바깥의 이른바 와인 신대륙에 눈을 돌린 회사이기도 하다. 창업주 바롱 필립, 즉 필립 남작(1902~1988)이 70년대 로버트 몬다비와 손잡고 미국에서 탄생시킨 ‘오퍼스 원’은 지금도 캘리포니아의 대표적 명품 와인으로 꼽힌다.

남작의 딸이자 현 소유주인 필리핀 남작 부인은 90년대 말 칠레로 발을 넓혔다. 칠레 측과 합작으로 고급 와인 ‘알마비바’를 만들어내는 한편 대중적인 브랜드 ‘에스쿠도 로호’를 단독으로 생산하고 있다. “칠레에 100만㏊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어요. 좋은 와인을 만들어낼 잠재력을 보고 장기 투자를 한 것이죠. 이후 호주나 이탈리아에서도 합작 제의가 있지만 기존의 것에 집중하자는 입장입니다.”

서울 신라호텔에서 13일 열린 ‘무통 로칠드 와인 갈라에는 세 가지 빈티지(생산연도)의 ‘샤토 무통 로칠드’와 무통 로칠드의 세컨드 와인 ‘르 프티 무통’ 등 9종의 와인이 등장했다. [신라호텔 제공]

이 회사가 가장 최근 주목한 새로운 와인 산지는 뜻밖에도 프랑스, 그중에도 명품 와인과 거리가 멀었던 남부 랑그도크 지역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생산지이자, 가장 재배 면적이 넓은 곳이지요. 지역이 넓어 품질이 관리되지 않았고 싼 와인만 생산해 왔었죠. 20년쯤 전부터 이 지역이 새로 정비되기 시작했어요. 이런 새로운 잠재력을 보고 10여 년 전 투자를 시작했죠. 랑그도크는 지중해와 피레네 산맥에 가까워요. 산과 바다, 그리고 내륙까지 복합된 지형이라 보르도와 또 다른 아주 좋은 와인을 생산할 잠재력이 있지요. “바롱 필립은 현재 이 지역에서 고급 와인 ‘도멘 드 바로냐르크’와 대중적 브랜드 ‘카라바스’를 생산 중이다.

전통적인 와인 명가이면서도 이처럼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특징을 그는 “혁신의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와인 애호가들이 익히 아는 대로 창업주 필립 남작은 와인 산업의 역사에서 두고 두고 회자되는 굵직한 업적을 여럿 남겼다. 1855년 파리 박람회를 앞두고 실시된 평가에서 최고등급(그랑 크뤼)을 받지 못했던 무통 로칠드가 73년 마침내 그랑 크뤼가 된 것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전설 같은 일로 전해진다.

이 와인은 병에 붙이는 라벨도 명품급이다. 1940년대 중반부터 피카소·미로·샤갈·워홀 등 이름난 예술가들이 라벨을 그려왔다. 이런 최고급 와인과 나란히 ‘무통 카데’ 같은 대중적 브랜드를 생산해온 역사도 짧지 않다. 포도 작황이 나빴던 1930년대 초 ‘샤토 무통 로칠드’의 명성을 고수하기 위해 새로 이름을 붙여 내놓은 것이 ‘무통 카데’다. 무통 카데는 곧바로 인기를 끌었고 다른 밭의 포도를 섞어 수요를 감당하게 됐다.

“혁신의 정신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과 혁신’이 회사 모토예요. 흔히 경쟁사가 어디냐고 묻곤 하는데 제 대답은 ‘없다’입니다. 잘난 척 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컨셉트·와인의 스타일에서 견줄 곳이 없어요. 최고급에서 대중적인 브랜드까지, 캘리포니아에서 랑그도크까지 아우르는 이런 회사는 달리 없습니다.”

일본에 살고 있는 그는 만화 ‘신의 물방울’의 일본판 드라마 소식도 들려줬다. “올해 방송됐는데 평가가 나빴어요. 일본에서는 욘사마가 출연해 한국에서 만들어질 드라마가 좋은 작품이 될 거라고들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만화의 영향력에 대해 “와인을 좀 더 편안하게 즐기게 도와주는 점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와인을 겁내기도 하죠. 잘 모른다는 이유에서요. 하지만 와인은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스스로의 감각에 따라 시간을 갖고 접하면서 자유로이 느껴야죠.”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요즘 프랑스 젊은이들처럼 나도 10년 전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와인을 잘 몰랐다”고 했다. “관심은 있었지만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알고, 맛보고, 배우면서 열정을 느끼게 됐죠.”

이날 와인 갈라에는 세 가지 빈티지(생산연도)의 ‘샤토 무통 로칠드’와 무통 로칠드의 세컨드 와인(어린 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 ‘르 프티 무통’ 등 9종의 와인이 등장했다. 이에 맞춰 신라호텔 프랑스 식당 ‘콘티넨탈’이 준비한 코스 요리가 입맛을 북돋웠다. 구르멜은 “와인 갈라는 와인과 음식, 장소·서비스·참석자가 고루 중요하다”면서 “이번 갈라는 오랜 관계를 맺어온 신라호텔의 30주년을 기념해 남작 부인의 개인 저장고에서 와인을 가져오는 등 특별히 준비했다”고 전했다.

와인이 등장하는 동안 그는 참석자들에게 간략한 설명을 들려줬다. “2000년은 역시나 좋은 빈티지죠. 저도 오랜만에 맛보네요. 앞으로 20년은 더 두고 먹어도 좋을 와인입니다. 병도 한번 보시죠. 무통 로칠드를 상징하는 양(羊·무통)을 음각으로 새겨 넣었어요. 병 자체가 예술품이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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