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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사망 22개월 만에 20권짜리 '전집'을 얻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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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호 33면

1932년 늦은 가을 베이징사범대 소운동장에서 강연하는 루쉰. 김명호 제공

루쉰(魯迅)은 생전에 전집(全集)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손수 목록을 작성하고 분류까지 했지만 출간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났다. 국민당 정권은 출판에 대한 규제가 엄격했다. 특히 개인의 전집은 허가를 받아야 했다. 정부는 '루쉰전집'의 출판에 대해 가타부타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장례식이 끝나자 쉬광핑(許廣平)은 남편의 육필 원고를 들고 이사했다. 가택 수색에 대비해 원고를 부엌의 석탄더미 속에 숨겨 놓고 전집의 출판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정부와의 소통을 위해 남편이 생전에 담을 쌓고 살았던 후스(胡適)에게 편지를 썼다. 후는 ‘루쉰기념위원회’ 위원직을 수락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35>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원고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더욱 전집의 출판을 서둘렀다. 살기 싫은 세상을 억지로 살며, 울화통 터질 때마다 어찌나 써댔던지 그간 단행본으로 나온 것 외에 유고만 해도 양이 엄청났다. 인쇄비 마련을 위해 문화계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머리를 짜냈다. 미국 다우링(Dowling)사의 최고급 지를 사용하고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제자(題字)를 한 정장기념본을 예약 받기로 했다. 정가는 200위안, 예약자에 한해서는 100위안이었다. 당시 시중에 나돌던 송(宋)대 판본과 비슷한 가격이었다. 홍콩에 있던 쑨원(孫文)의 아들이 10질을 예약했고 팔로군(八路軍) 쪽에서도 예약권을 여러 장 구입했다.

후일 신중국의 초대 최고인민법원장에 취임하게 되는 선쥔루(沈鈞儒)는 예약권을 팔아주기 위해 다과회를 열었다. 국민당 인사들을 대량 초청했다. 이재에 소질이 있다고 알려진 사람이 돈 있는 국민당 추종자들을 몰고 나타나 10장을 구입했다. “투자가치가 있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경비문제가 해결되자 쉬광핑은 편집에 날밤을 새웠다. 루쉰의 제자들은 인쇄소에서 살다시피 했다. 4개월 만에 인쇄와 제본이 완성됐다. 1938년 8월 1일, 루쉰 사망 22개월 후였다.

전집은 모두 20권이었다. 보급판과 함께 정장본도 냈다. 일련 번호를 붙인 정장기념본은 200질을 만들었다. 남목(楠木)으로 상자를 만들어 문을 열면 위·아래 층으로 나누어진 아주 품위 있는 가구 형태였다. 나오자마자 문물 취급을 받았다. 60년대에 중국에 와서 살다시피 했던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는 1938년판'루쉰전집' 정장기념본을 구하고 싶어 했다. 소문을 들은 저우언라이가 선물을 하려고 했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소장자들에게 눈치를 줘도 내놓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쉬광핑이 한 질을 보내주는 바람에 저우는 시아누크에게 체면이 섰다. 쉬는 3질을 소장하고 있었다.

마오쩌둥도 한 질을 갖고 있었다. 출처는 불분명했지만 일련 번호 58번이 찍힌 진본이었다. 틈날 때마다 꺼내 보며 애지중지했다. 전쟁시절 여러 곳을 전전할 때도 '루쉰전집' 정장기념본만은 꼭 챙겼다. 중난하이 입주 후에도 여전했다.

한번은 전집을 뒤적거리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참 보관에 애먹은 책이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보면 노상에서 적과 교전하는 경우가 있었다. 전사들이 등에 나눠 지고 행군하고 전쟁하고 그랬다. 아직까지 멀쩡한 게 기적이다. 나를 위해 등에 지고 다닌 전사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며 '루쉰전집'을 쓰다듬었다.

중국의 중학생 교과서에 루쉰의 글 대신 량스치우(梁實秋)의 산문을 넣기로 했다는 보도가 최근에 있었다. 량도 후스처럼 루쉰과 생전에 각을 세웠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딸에 따르면 죽는 날까지 '루쉰전집'과 '셰익스피어전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루쉰의 글이야말로 중국인들의 영혼이며 개개인의 살아있는 역사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회와 역사, 특히 중국인을 이해하려면 '루쉰전집'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한 사람도 량스치우였다. 한글판은 아직 나온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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