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세 노구의 이홍장, 서태후의 목숨을 구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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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호 33면

1900년 겨울 베이징을 점령한 서구 열강과 담판하기 위해 회담장에 도착한 이홍장. 김명호 제공

기독교는 중국인의 종교가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가장 중요시했다. 사대부들은 ‘만세(萬世)의 사표(師表)’라고 존경하는 공자의 제사도 함께 지냈다. 7세기 초 천주교와 비슷한 종교인 경교(景敎)가 중국에 들어와 200년을 꾸역꾸역 버텼지만 당(唐) 왕조의 배불 정책에 덩달아 된서리를 맞고 자취를 감춘 적이 있었다. 몽고족이 통치하던 원(元)대에 다시 들어왔다. ‘십자교(十字敎)’라고 불리며 성당을 짓고 『성경』도 번역했지만 원이 망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주교는 명(明) 말 예수회를 통해 중국에 발을 붙이기 시작했다. 청(淸) 옹정(雍正) 황제 시절엔 러시아 정교의 선교사들도 황제의 명에 중국에 들어와 포교를 했다. 개신교(改新敎)는 아편전쟁을 전후해 모든 교파가 중국에 발을 디뎠다. 예수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기독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36>

천주교는 중국인 신자들에게 하늘·조상·공자에 대한 제례를 금지시켰다. 어겼을 경우 교회에서 내쫓았다. 사대부의 반감을 사고도 남을 일이었다. 개명한 황제에 속했던 강희제(康熙帝)조차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전도사들이 중국의 예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추방하겠다”는 교지를 내렸지만 본격적인 탄압은 없었다. 베이징(北京) 교외에 선교사들의 묘지가 있고 수백 명이 묻혀 있는 것을 보면 중국 정부는 선교를 용인했다고 봐도 된다.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대포와 아편을 이용해 중국의 대문을 두들겨 댔다. 중국은 참패했다. 서구 열강들은 불평등조약을 강요했다. 조약마다 “중국에 온 선교사들을 보호하고, 이들의 자유로운 선교를 보장하며, 예배당 신축을 허락한다”는 대목이 빠지지 않았다. 전국의 중소 도시는 물론 시골 촌구석까지 교회가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청일전쟁 이후에는 4000여 개로 증가했다.

중국에 몰려온 서구의 선교사 중에는 일확천금이 목적인 엉터리들이 많았다. 불평등조약에 의지해 온갖 특권을 누리며 교회 신축을 빙자해 토지를 강점했다. 지방정부는 완전히 이들의 밥이었다. 동서남북 할 것 없이 현지인들과의 충돌이 빈번했지만 정부는 ‘교회를 보호하고 민중의 불만을 억누르는’ 정책을 견지했다. 중국인 신자들 중에도 서양인 선교사들을 믿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1899년 산둥(山東)성에서 일이 터졌다. 산둥은 1300여 개의 교회에 8만여 명의 선교사와 신자가 몰려 있었지만 민간 비밀결사인 의화단(義和團)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단원들은 순박한 농촌 출신 청소년이 대부분이었다. 미신에 가까웠지만 규율이 엄하고 탐재와 호색을 금했다. 전란과 천재지변, 실업에 시달리던 현지인들에게 선교사와 일부 신자의 악행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의화단 단원들은 “청 왕조를 떠받들고 양인들을 몰아낸다”는 구호를 내걸어 민심을 얻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교회를 보호하고 민중의 불만을 억누르는’ 정책은 제국의 근간이 위협받을 정도로 선교사들의 세력을 확장시켰다. 자탄하던 정부는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시켜 의화단을 진압하는 동시에 합법적인 민간 단련단체로 인정하는 양면정책을 취하기에 이르렀다.

1900년 6월 서태후는 진압을 피해 베이징 인근까지 이동한 의화단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청군(淸軍)에는 의화단에 협조해 교회와 외국 대사관의 파괴를 명령했다. 벨기에와 오스트리아·이탈리아 대사관은 속 시원하게 때려 부쉈지만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일본 대사관은 실패했다. 서방 8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해 베이징으로 향하자 서태후는 의화단을 진압하며 각국 대사관에 국수와 과일 등을 보내 화의를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8월 14일 ‘8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진입하자 서태후는 농부로 가장해 겨우 탈출했다.

시안(西安)에 도착한 서태후는 이홍장(李鴻章)에게 열강과의 교섭을 맡겼다. 광둥(廣東)에 머무르던 이홍장은 77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했다.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11개월을 끌며 ‘신축(辛丑)조약’을 체결해 서태후의 목숨을 구했다. 그가 외국과 체결한 30여 개의 조약 중 가장 치욕적인 조약이었다. 3개월 후 피를 토하고 세상을 떠났다.

량치차오(梁啓超)는 “힘든 일을 피하지 않았고, 어설픈 사람들의 비방을 겁내지 않았던 것은 큰 장점이었다”며 후한 평가를 내렸다. 후일 한 역사가도 “혼군(昏君)을 기쁘게 했고, 열강을 막았다”며 이홍장의 죽음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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