科技 자문회의, 권력 최상층부로 끌어올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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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호 22면

“경제 위기는 이노베이션의 어머니다. 소비자가 가치관을 바꾸고 기업도 개혁의 지혜를 모으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미국 금융위기가 끝난 직후인 1908년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연 포드자동차의 ‘T 모델’이 탄생했고 1930년대 세계 경제 공황 후엔 의복 혁명을 가져온 나일론이 등장했다. 석유 위기가 한창이던 1979년엔 휴대용 오디오 시대를 연 소니의 워크맨이 나왔다. 지금도 훗날 역사가는 이노베이션이라 부를 태동이 있을 것이다.”(니혼게이자이신문)

국가 과학기술 리더십의 길 1 美 오바마

“20세기 과학과 사회의 관계는 단순했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자 제약업이 나왔다. 월리스 캐러더스가 나일론을 발견하면서 듀퐁이 이익을 취했고, 프리츠 하버와 카를 보슈가 암모니아 합성에 성공하자 비료산업이 생겨났다. 이같이 노벨상을 받은 과학기술 성과가 극히 단순하게 가치로 연결된 것이 20세기의 특징이다. 다만 지금부터는 조각 그림 맞추기 퍼즐처럼 지식이 산같이 쌓인 가운데 어떻게 그림을 그려야 할지 묻게 된다.”(고미야마 히로시 전 도쿄대 총장, 하토야마 정부의 국가전략실 좌장에 내정)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이노베이션 중시 과학기술 정책을 되새겨 보려는 일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다.오바마 대통령의 과학기술 정책을 보는 영국의 시각은 자기 반성적 성향이 강하다. 지난 7월 23일자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는 주목할 만한 사설(제목 ‘Science in power’)이 실렸다. 오바마 대통령이 정부의 최상층에 강력한 과학팀을 포진시키고 모든 연방기관을 관통하는 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를 구성했는데 이는 영국이나 유럽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자존심이 강해 미국의 정책에 대해 좀처럼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는 유럽의 관행에 비춰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사설에 따르면 영국 하원의 과학위원도 마침 비슷한 주문을 한 바 있다. 현대의 모든 정부는 행정부 수반 가까이에 강력한 수석과학자를 두는 게 필요하며 그를 지원하는 조직을 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문이 영국의 경우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는 자평이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수석과학자와 1년에 단 네 차례 만났을 뿐이다. 결국 영국의 과학부는 노동당과 보수당 사이에서 갈팡질팡해 오다 최근 기업혁신기술부(Department for Business, Innovation and Skills)로 편입됐다.

오바마 정부는 출범하면서 과학기술을 국가 핵심 전략으로 채택했다. 미국의 세계 과학기술 리더십을 복원하고 과학기술 정책을 행정부의 핵심 어젠다로 설정함으로써 국가 차원의 혁신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과학기술담당 보좌관이 운영하는 과학기술정책국(OSTP)은 백악관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정치적 의사 결정과는 무관한 과학기술자문위원회는 대통령에게 수시로 전문적인 자문을 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4월 27일 발표한 대통령 과학기술자문위원회 멤버엔 OSTP 국장 겸 과학기술담당 보좌관인 존 휄더른(전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 환경정책 교수 겸 과학기술공공정책학부장)을 비롯해 에릭 랜더 MIT대 생물학 교수, 해럴드 바머스(1993~99년 국립위생연구소장 역임) 메모리얼 슬로언 케터링 암연구소장, 로지나 비어바움 미시간대 천연자원 및 환경학부장, 크리스틴 카세 오리건 위생과학대학 의학부장, 크리스토퍼 치바 프린스턴대 천체물리학 교수 등 20명의 쟁쟁한 과학기술계 인사가 포함돼 있다. 이들은 정부와 학계의 주요 보직 경험자들이다. 대선 당시 오바마 후보에 과학기술 정책을 자문했던 에릭 슈밋 구글 회장 등 기업 쪽 인사도 일부 참여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과학기술계 주요 인맥은 전미과학아카데미(NAS)와 전미과학진흥협회(AAAS) 회원이 차지하고 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로런스 버클리 국립연구소장을 지낸 스틴븐 추 에너지부 장관, 국제과학회의 회장을 역임한 제인 라브첸코 해양대기국장, 하버드대 총장 출신인 로런스 서머스 국가경제회의(NEC) 위원장, 해럴드 바머스 대통령 과기자문위원회 공동의장, 에릭 랜더 대통령과기자문위원회 공동의장 등이 두 기관 회원이다.

NAS는 오바마 대통령이 가장 존경한다는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때인 1863년 3월 3일 발족시킨 기구로 과학기술에 관한 모든 정부기관의 요청에 대해 연구·조사·심의·실험을 해 보고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이곳은 미 정부의 최대 싱크탱크로 가장 신뢰를 받고 있다. 과학 잡지 ‘사이언스’를 발행하는 AAAS는 연차총회 때마다 국내외에서 1만 명가량의 과학기술 인사가 모이는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지난 2월 연차총회에선 대부분의 시간을 지구온난화에 할애해 오바마 정부에 큰 기대를 표시했다. 일본과 중국 과학기술계는 오바마 정부 출범에 맞춰 미국의 주요 국립연구기관과 포괄적인 연구협력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개별적으론 NAS·AAAS 인사들과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후 과학기술 정책 방향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투명성과 열린 정부에 관한 각서(1월 21일) ▶아메리카의 회복과 재투자법(2월 17일) ▶사이언스 인테그리티(과학기술 종합력)에 관한 대통령 각서(3월 9일) ▶‘책임의 신시대’를 제목으로 한 2010년 예산안(2월 26일) 등이다.

오바마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내용은 대략 4개 분야로 나눠볼 수 있다. 우선 과학 분야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과학기술 장려와 차세대를 위한 과학기술 및 공학·수학에 관한 교육 장려가 정책의 목표다. 기술 분야에선 최신 초고속 통신망의 정비, 국민 의료 데이터의 컴퓨터화에 의한 의료 비용 삭감, 정부 최고기술책임자(CTO)에 의한 21세기형 정책의 전개 등을 과제로 꼽고 있다.

에너지 분야에선 2050년까지 탄소 배출 거래 등으로 온실가스 90년대 수준의 80% 삭감, 2025년까지 전력의 25%를 신에너지로 전환해 2015년까지 플러그 인 하이브리드 자동차 100만 대 보급, 2025년까지 정부 빌딩 탄소 제로 배출 실현 등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나라의 안전과 국제 관계 분야로 ‘핵무기 없는 세계 실현’을 향한 노력과 4년 이내 핵 물질 안전성 확보 등을 목표로 내걸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과학기술 정책의 종합적인 수립과 조정을 특히 중시한다. 각 부처가 종합적인 정책을 수립하도록 하는 게 기본 방침이나 여러 부처에 걸쳐 있는 과제는 OSTP와 관련부처가 모이는 국가과학기술회의(NSTC) 및 국가조정실(NCO)에서 조정한다. 또 의회에 의한 수정도 가능하게 함으로써 다중적으로 체크 앤 밸런스를 실현하는 특색이 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박영서 원장은 “미국 과학기술 정책 수립에서 중요한 것은 기구의 유무나 직위 고하가 아니다”며 “정치적인 의사결정으로부터 자유롭고 범정부 차원의 통합적인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실질적인 거버넌스 체제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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