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4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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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42. 전투병력 첫 파병

65년 8월 상정된 국군 전투부대 월남파병안은 예기치 않은 역풍(逆風)에 휘말려 국회 본회의 통과마저 힘든 상황으로 변해갔다.

내가 맞바람의 주역인 차지철(車智澈)의원에게 '이제 그만하자' 고 했더니 '무슨 말 하느냐' 며 오히려 나를 설득하러 들었다. 車의원의 반대론은 결국 朴대통령이 직접 나서 설득한 끝에 겨우 잠 재울 수 있었다. 겨우 한숨 돌리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더 큰 일이 터졌다.

여당의 최고위급 인사인 정구영(鄭求暎)공화당 의장이 파병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격노했고 야당마저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나는 鄭의장을 설득하러 북아현동 자택을 찾아 갔는데 집이 얼마나 초라한지 그의 청빈(淸貧)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나는 어렵사리 협조를 부탁했지만 鄭의장은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와의 투쟁인데 한국이 개입하는 것은 잘못' 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鄭의장은 결국 이 일로 朴대통령의 눈 밖에 났고 파병안이 통과된지 얼마 후 정치에서 영원히 손을 뗐다. 그 일은 지금도 내게 가슴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이번에는 제1야당인 민중당 대표 최고위원인 박순천(朴順天)여사도 찾아갔다.

朴여사는 내 어머니의 친구여서 나를 아들 대하듯 했다. "李군, 공화당이 왜 이러나□ 미국의 협조 요청도 있어서 도와 줄려고 했더니 車의원이 나서 우리 당 소장 의원들까지 흔들어 놓지를 않나. 鄭의장까지 반대하니 이제 나도 어쩔 수 없네. " 이런 가운데 김성은(金聖恩)국방장관이 '미국이 파병요청을 한 적이 없다.

우리는 월남 요청으로 파병을 결심했다' 는 요지의 기자회견을 했는데 마치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 같았다. 이미 브라운 미국대사가 야당 수뇌부를 만나 '사실상 미국의 요청' 이라며 설득하고 다녔는데 국방장관이 이를 뒤집자 야당은 정부를 '거짓말쟁이' 라고 거세게 몰아 붙였다.

결국 파병안은 8월 11일 한.일 협정 비준 동의안이 국회에서 변칙 통과된 뒤 야당 의원 모두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자 13일 여당과 무소속 의원만 출석한 가운데 전격적으로 통과되었다.

파월 전투부대는 9월 16일 선발대를 시작으로 10월 26일 기갑연대가 부산항을 떠남으로써 파병이 마무리 되었다. 그러자 미국은 또다시 파병을 요청해 왔다.

나는 12월 유엔총회 참석차 도미(渡美), 러스크 국무장관과 회담을 가졌는데 러스크가 또 파병해 달라며 안달이었다. '한국군 전투부대가 베트남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며 한참을 추켜 세우더니 2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를 더 파견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이 전투부대 파병시 해 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있으니 어렵지 않겠느냐. 먼저 미국이 한국지원 약속을 지켜야 협상이 가능하다' 고 원칙론을 거듭 강조했다. 그렇고 나서 곧바로 귀국했는데 미국은 한 시가 급했던지 험프리 부통령을 대통령 특사로 서울에 보내겠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자세히 보니 방한(訪韓) 날짜가 66년 1월 1일이었다. 험프리 방한에 대한 내 보고를 받자 朴대통령은 "미국은 설도 안 쇠나?" 하며 퉁명스러운 어투였지만 내심으론 흐뭇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미국놈들 다급하긴 어지간히 다급한 모양이지…" . 1월1일 험프리가 서울을 방문하던 날은 유난히도 추운 날씨였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험프리는 두툼한 목도리에 코트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 온 그는 나를 보더니 "李장관,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며 꾀 절친한 친구나 되는 양 부등켜 안고 '호들갑' 을 떨었다. 얼굴에는 옅은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미국 정치인들은 꼭 연극배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험프리의 수다가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청와대로 가는 차 안에서 '朴대통령은 차분한 대화를 좋아하니 말 수를 좀 줄이는게 좋겠다' 는 충고까지 해 주었다.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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