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건설 최태해 회장 고향에 고원사 건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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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추석 연휴 첫날인 지난달 23일 경북 군위군 소보면 신계리 고원사(高願寺). 주지인 정현(正賢)스님이 허름한 옷차림의 70대 노인과 함께 절을 둘러 보고 있었다.

"대웅전 불상 뒤 탱화도 좀 손봐야겠고…" 노인은 다름 아닌 일본 아마가사키시(尼崎.오사카 인근)에 있는 고산(高山)건설의 최태해(崔泰海.77)회장이다.

그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혼자 일본으로 건너가 기업을 일으킨 입지전적 인물이다. 고향 생각하는 마음도 남다르다.

군위군청.소보면사무소.송원초등학교.소보파출소 사택 등 관공서를 지어주거나 건축비로 수억원씩을 선뜻 내놓았다.

고원사는 1백여억원을 들여 지었다. 그래서 그의 귀향은 군민들에겐 큰 뉴스가 되곤 한다.

"변변한 농토가 없어 많이도 굶었지요. 어린 나이였지만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피죽이 먹기 싫어' 일본행을 결심한 그가 부산에서 여객선을 타고 친형(작고)이 있던 큐슈(九州)로 간 것이 열다섯살 먹던 해(1937년)였다.

처음 한 일은 광부. 나이가 어리다며 받아 주지 않아 애걸복걸해 얻은 일자리였다. 밤낮으로 막장에서 석탄을 캤다. 여기서 낙오하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사력을 다해 일하고 또 일했다.

2년쯤 뒤 친구가 있는 도쿄(東京)로 가 줄.톱을 만드는 회사에 취직했다. 이때 야학에서 대학생 형들로부터 소학교(초등학교)4학년 과정까지 배웠다.

"주경야독으로 정신없이 일하고 공부했어요. 하루 3~4시간씩 밖에 못 잔 생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 그는 또다시 '괜찮을 것 같아' 직업을 선원으로 바꾸고 중국.한국에서 수탈한 쌀(공출미)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배를 탔다. 1년여 뒤 공출미를 싣고 일본으로 오다 사고를 당했다.

"배가 너무 낡아 태평양의 파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침몰했어요. 선원 45명 가운데 30명이 죽었지요. " 선원생활을 청산하고 잠시 귀국한 崔회장은 결혼을 했고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부인에게 약간의 생활비만 보내주고 가족.친척.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어 버렸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쓰면 돈을 모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0년 후 제법 재산을 모아 귀국했지만 부인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갔고, 하나 밖에 없던 딸은 병으로 숨진 뒤였다.

방황 끝에 재혼한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전봇대를 세우고 대형 건물에 전기 시설을 하는 전기설비업에 손을 댔다.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일본인 이상의 신용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밤잠을 마다하고 신용을 쌓아나갔다.

"일이 너무 힘들어 남몰래 많이도 울었지요. 일본 사람도 많은데 한국인인 내게 돌아올 일거리가 있었겠어요. " 그러나 그의 성실함이 알려지면서 공사수주도 점차 늘어났다. 37세때 설립한 고산건설은 이렇듯 그의 '신용' 을 바탕으로 성장해 지금은 직원이 1백40명에 이른다.

그는 지난해 생애 마지막 사업으로 고향에 고원사를 지었다. 군민들에게 마음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절에는 시험을 앞둔 학부모들이 치성을 드릴 수 있는 '학사보살' 이 세워져 있다. 崔회장은 "공부를 못한게 한이 돼 학사보살을 세웠다" 고 했다. 그는 "10년만 '근면.성실' 하게 일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실천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며 젊은이들이 열심히 일해 줄 것을 거듭 당부했다.

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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