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로 수기 독점연재] 18. 어머니, 미움을 넘어섰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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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8. 감옥에서 찾은 모국어

"히로상(희로씨), 모국의 언어와 역사는 꼭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비열한 인간들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받더라도 모국에 대한 지식과 정신적 토양만 확실하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

내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은인 가운데 한 사람인 고(故)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교수가 생전에 내게 들려준 충고는 기나긴 감옥 생활의 버팀목이 됐던 한글 공부의 계기가 됐다.

가나가와(神奈川)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친 그는 내가 후지미야(ふじみ屋)여관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찾아온 일본인 지식인중 한 사람이다.

재판 과정에는 '김희로 공판대책위원회' 를 조직해 나를 도와줬으며, 수감생활 중에는 마스미(眞澄)부인과 함께 자주 면회와 책이나 사전류를 넣어주고 갔다. 안타깝게도 89년 5월 직장암으로 타계하기 전까지 그는 나의 간접적인 한글 선생님이었다.

내가 한글 공부를 시작한 것은 사건후 3, 4년이 지나 시즈오카(靜岡)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였다. 일본어에 중간중간 모국어를 섞어 말을 하는 어머니는 면회올 때마다 "희로야, 조선말을 모르면 어머니의 진짜 마음을 알지 못한데이" 라고 했다.

'오모니(オモニ)' 와 '오카아상(おかあさん)' 은 다같은 '어머니' 란 뜻이지만 어감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모국어를 전혀 모르던 당시의 나에게도 가슴에 와닿았다.

내가 외출할 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단디해라이( '조심해라' 의 경상도 사투리)" 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정감있는 말처럼 들렸다.

어머니와 가지무라 교수의 권유에 따라 한글 공부를 시작했지만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도중에 수 없이 포기했다. 한글 발음연습에만 몇 년이 걸렸는지 모른다.

가지무라 교수가 넣어준 '조선어대사전' (가도가와서점)의 부록 '발음편' 이 나의 유일한 교재였다. 예컨대 한글의 '이' 라는 발음을 배울 땐 "일본어의 '이(い)' 와 비슷한데 입술은 평평하게 벌린다" 는 사전 상의 설명에만 의존했다.

한글 공부를 시작한 지 수십 년이 됐지만 아직도 엉터리로 발음하는 것은 아무도 교정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겐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사전이 또 있다. 어머니가 넣어준 '신영화(英和)대사전' (연구사)과 당신의 손바닥 도장이 찍혀있는 '뉴 잉글리쉬 코리안 딕셔너리' (美예일대)이다.

문맹인 어머니는 아들의 한글 공부를 위해 이곳저곳 수소문한 끝에 어렵게 그 사전들을 구해다 주신 것이다.

두 권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한 쪽은 영어를 일본어로, 다른 한 쪽은 영어를 한글로 설명해놓았기 때문에 문장을 익히는데는 기막힌 교재였다. 물론 영어공부는 덤이었다.

나에겐 수 십권의 옥중노트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지도 모르던 나는 그 노트 속에 자신의 생각과 일상 속의 세세한 기록을 빼곡히 메모해 두었다.

일단 일본어로 쓰고 그 윗칸에 한글로 옮겨적은 그 노트는 나의 한글 학습장이기도 했다. 모든 옥중 노트는 형무소측으로부터 월 1회 정기검열과 부정기적인 기습검열을 받아야 했다.

만일 형무소를 비판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내용이 있으면 그 위에 검은 칠을 해버렸다. 심하면 노트를 빼앗고 수형자 급수를 낮춰버리기도 했다.

1978년 3월13일-검사장에서 OO로부터 폭행당하다. 6월5일-어머니를 생각하며 힘내고 있으나 인간의 존엄이 짓밟혔을 때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7월22일-형무소 당국이 현재 나에게 가하고 있는 노동은 질이나 양적으로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형무소측은 이런 내용들에 대해 검은 칠을 했다. 조심스레 검은 덧칠을 벗겨내 불빛에 비춰보면 희미하게나마 지워진 내용이 드러나기도 한다.

지금은 불미스런 일로 헤어졌지만 80년대 중반에 옥중결혼한 한국의 D라는 여인과 주고받은 편지는 중요한 한글 작문공부였다.

내가 노트에 일본어로 내용을 적어 형무소측에 건네주면 가지무라 교수가 다시 받아 한글로 번역한 다음 내게 돌려준다.

그것을 보며 다시 편지지에 한글로 옮겨쓰는 일이 10년 이상 계속됐다. 주고받은 편지만 해도 라면 한 상자 분은 충분히 될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죄 많은 인간의 연애편지까지 번역해주신 가지무라 교수를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수형생활 동안 일본 형무소 안에서 나는 내용에만 제한을 받았을 뿐 비교적 자유롭게 한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특히 D와의 한글 서신교환을 허락해준 다카무라(高村)전 구마모토(熊本)형무소장에겐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형무소측이 한글 공부를 허락해주지 않아 2년 정도 중단한 일도 있었다. 5-6년전 가와바타(川端)라는 신임소장이 부임해와서는 한글 메모장과 한국노래 카세트 테입 등을 몽땅 몰수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네 일본인들은 옛날에 우리 민족의 말과 이름은 물론, 민족적 자긍심마저 빼앗아 놓고 또 그 짓을 되풀이하려 하는가" 라고 항의했지만 1급이던 수형자 급수가 맨 밑인 4급으로 떨어지는 불이익만 당했다. <계속>

◇ 알림〓권희로(權禧老)씨의 국내 정착과 앞으로의 활동을 돕기 위한 후원회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부산 자비사로 연락바랍니다.

051-46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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