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 先과 後, 輕과 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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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흔히들 중앙일보 문제를 크게 두 갈래 시각으로 나눠 보고 있다. 하나는 사주의 개인비리에 대한 수사로 보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탄압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렇게 나눠 볼 요소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이런 이분법은 자칫 문제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고 그 본질을 왜곡하기 쉽다.

이번 중앙일보 문제의 본질은 실은 간단명료한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게 하나도 없다.

한마디로 이번 문제는 중앙일보 지면에 대한 불만과 홍석현(洪錫炫)사장에 대한 '괘씸죄' 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 대선 때부터 미운털이 잔뜩 박혀 있는 터에 거적을 깔고 죄를 기다리기는커녕 정권 출범 후에도 자주 뻗대고 깐깐하게 구는 것을 보다 못해 정권이 혼내주기와 길들이기에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선 중앙일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5회에 걸쳐 그동안 정부와의 갈등을 구체적으로 적시했으므로 충분히 입증됐다고 믿는다.

녹음테이프와 판갈이한 신문이 엄연히 남아 있는데도 그를 부인하고 발뺌하기도 했으나 물증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쪽 말이 옳은가는 누구라도 쉽게 가려낼 수 있다.

또 직책상의 항의와 해명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도 있지만 말과 글이 직업인 사람들이 직책상의 항의 및 해명과 압력 및 탄압을 구별 못할 리 없지 않은가.

'국민의 정부, 언론탄압 실상을 밝힌다' 라는 시리즈를 읽은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절감했을 것이다. 정치권력이 끊임없이 갖가지 압력수단을 동원해 언론을 통제.장악하려는 그 행태는 불행히도 옛날 그대로다.

정권 담당자들의 의식도 통제의 메커니즘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실은 이 점이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기다림의 대가가 고작 이것인가. 중앙일보가 그동안 사회 일각에서 왜 그리 기사의 양이 많으냐는 등의 문제제기가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면서도 대대적인 보도를 해온 것은 중앙일보 문제의 발단과 그 본질, 그리고 달라진 것 없는 권력의 언론통제 현실을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중앙일보의 과감한 폭로가 사주의 개인비리를 비호하기 위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사회적 공기(公器)인 언론사의 사주로서 비리 혐의로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중앙일보 차원에서 반성을 해야 하고 이미 1차로 그 사과의 뜻을 표한 바 있다.

또 그 형사적 책임여부는 사건이 법의 심판에 맡겨져 있으므로 그 결과 책임질 일이 드러나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다만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개인 비리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귀결이 되든 간에 그것으로 해서 보다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인 언론의 자유 통제 문제가 희석되거나 덮어져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국민의 알권리를 위한 언론의 자유문제는 개인비리와는 경중(輕重)을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중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때 즉시 폭로를 하지 않았느냐며 사과부터 하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그점에 관해선 중앙일보가 반성하고 사과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개 신문사의 반성과 사과를 더 본질적이고 중대한 정치권력의 언론통제에 우선시키려는 것 역시 일의 선후(先後)와 경중을 뒤바꾼 것이다.

반성과 사과가 부족했다면 차후에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다. 또 우리는 앞으로는 어떠한 외압에도 결연히 대처함으로써 그 반성과 사과를 실천을 통해 두고두고 보여줄 각오다.

그러나 현 정부의 언론통제실태를 파헤쳐 정부가 더이상 국민의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게 하는 일은 시간을 다투는 일이다.

우물쭈물 시간을 흘려보내 일이 흐지부지 돼 버리면 중앙일보가 지금까지 당한 일은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

중앙일보는 바로 그 때문에 뒤늦더라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신념에서 수치를 무릅쓰고 굴종의 지난 나날을 스스로 까발렸던 것이다.

중앙일보 구성원의 절대 다수는 이번에 지난날을 스스로 폭로하면서 마치 대낮에 발가벗고 광장에 선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를 무릅쓴 것은 중앙일보가 충실한 국민의 대변자로 새로 태어나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이런 몸부림을 격려는커녕 정파의 눈, 패거리의 눈, 이해타산의 눈으로 보아 왜곡.비난하거나 평가절하한다면 중앙일보의 오늘은 그들의 내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국민 피해와 이 나라 민주주의의 퇴보로 귀결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언론 통제의 실상을 낱낱이 밝히고 그 책임을 엄중히 물어 정치권력과 언론과의 관계를 민주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도 살고, 언론도 살고, 그리고 현 정권도 사는 길이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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