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언론탄압 실상을 밝힌다] 5.끝 "정부 두드려까는게 만화입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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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권의 간섭은 중앙일보 지면 어느 구석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물며 독자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시사만평.만화가 정권의 촉수에서 벗어날 리 없다.

지난 5월 4일 먼저 제작한 가판 신문이 막 윤전기를 빠져나온 지 1시간여 지난 시간, 한남규(韓南圭)편집국장의 격앙된 목소리가 편집국을 울렸다. "공격한 만큼 그쪽에서도 공격하겠다고…. "

청와대 박준영(朴晙瑩)공보수석이 김상택(金相澤)화백의 '만화세상' 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는 전화를 걸어왔고, '고쳐달라, 안된다' 를 거듭하다 목소리가 거칠어진 것이다.

이날 만평은 국회에서의 정부조직법 개편안 날치기 통과와 관련한 것.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차 안에서 날치기 보따리를 받으면서 손가락으로 '승리의 V' 를 그리고 있는데, 옆에 섰던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이 '날치기까지 닮냐' 라며 쳐다보고 있다.

朴수석은 "만화가 매일 정부만 두드려까는 게 그 역할입니까" 고 따져물었고 급기야 중앙일보도 공격받을 수 있다는 식의 언급이 나오자 韓국장이 격분했던 것이다. 끝내 朴수석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앙일보에는 "만화.만평에 대한 수정 요구를 하지 않는다" 는 불문율이 있다. 다소 과장되더라도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풍자와 비판이 생명이기에 외부압력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절대 안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에 따라 韓국장은 어떤 외압사실도 金화백 본인에게는 한마디도 옮기지 않았었다.

3월 10일자와 12일자 '저격수' 시리즈는 "어떻게 불경(不敬)스럽게 대통령에게 총을 겨누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 는 강한 항의를 받았다. 10일자는 '저격수 가다' 라는 제목으로 김대중 정부에 강한 비판을 쏟아놓던 'DJ 저격수' -홍준표(洪準杓)한나라당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것을 '저격수가 저격당한 꼴' 로 풍자하고 있다.

12일자는 쓰러진 洪의원을 뒤로 하고 이부영(李富榮)한나라당 의원이 새로운 저격수가 돼 총을 들고 나오는 장면이다.

그러나 세무조사로 사장이 구속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만평에도 조그만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외압도 외압이지만 흉흉한 소문과 심상찮은 분위기에 위축된 경영.편집간부들의 신중론이 화백의 펜 끝을 무디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대표적인 예가 세무조사 발표 직전인 지난 9월 15일자 만평.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가 미국에서 金대통령을 '제왕(帝王)' 에 비유하고 현 정부를 '독재국가' 라고 비난한 것을 소재로 했다.

만평은 李총재의 연설을 듣는 청중 가운데 노벨 평화상 심사위원이 '(노벨평화)상 못받겠다' 는 독백을 하고 있다.

이 만평은 결국 경영.편집간부들의 판단에 따라 '동티모르 파병' 을 소재로 한 만평으로 대체됐다. 중앙일보를 대표하는 정운경(鄭雲耕)화백의 4단 만화 '왈순 아지매' 도 예외는 아니다.

박정희(朴正熙)정권시절부터 연재해온 鄭화백은 "朴정권 때는 수시로 남산(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곤 했다" 고 기억한다.

그러나 적어도 DJ정부에서 이런 고초는 없다는 것. 鄭화백은 그러나 "현 정부는 폭력 대신 보이지 않는 압력을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끊임없이 전해왔다" 고 토로하고 있다.

이런 곡절을 겪으면서 교체된 '왈순 아지매' 의 예가 지난해 10월 23일자 만화.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총풍(銃風)사건이 결국에는 소리만 요란한 바람(허풍)으로 끝난 것을 꼬집고 있다. 권력측의 강한 압력이 회사 고위간부에게 전달됐고, 그 간부는 '불가피한 상황' 이라며 개작(改作)을 당부했다.

그래서 대체된 만평은 교육개혁이 치맛바람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는 내용. 당연히 시사성이나 풍자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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