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3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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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36. 이후락과의 충돌

朴대통령은 자나깨나 경제 살리기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64년 8월말께, 대통령은 '라인강의 기적' 을 얘기하면서 외무장관인 내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독일은 2차대전 때 망했는데 어떻게 다시 일어났지□ 정말 대단한 일 아니오□" 나는 '경제부흥 비결도 알아보고 같은 분단국으로서 통일정책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며 독일방문을 건의했더니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내친 김에 영국.프랑스 방문도 건의했다. 그무렵은 특히 서울시가 도시계획을 추진중인 시점이라 대통령이 직접 런던.파리를 둘러 본다면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나라 살림도 어려운 판에 관광이나 다닐 처지요□" 하며 벌컥 화를 냈다. 해외 나들이 수행 때마다 익히 확인하곤 했지만 朴대통령은 일정에 조금만 호사스러운 게 있어도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朴대통령을 수행해 64년 12월7일부터 8일간 서독을 방문했다. 수도 본(Bonn)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어느날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갑자기 최덕신(崔德新)서독대사가 내 방으로 찾아오더니 눈물을 글썽이는게 아닌가. 그러면서 "명색이 3성 장군에 외무장관까지 지냈는데 이게 뭐냐□" 며 땅이 꺼질 듯 한 숨을 내 쉬었다.

사연인즉, 이후락(李厚洛)비서실장이 영접준비가 소홀하다고 지적하면서 '이 따위로 하려면 당장 사표를 내라!' 며 자신을 닦아 세웠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옆방으로 가 李실장에게 따졌다. "외무장관은 당신이 아니고 나요. 사표를 받아도 내가 받고 준비에 하자가 있으면 나한테 책임이 있는 거요. 당신이 뭔데 崔대사에게 사표를 내라고 하는 거요□" 그러자 李실장은 '외무장관이면 똑바로 해야지!' 하게 맞고함을 지르며 달려 들었다.

상황은 멱살잡기 일보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얼마나 분위기가 험악했던지 옆에 있던 박종규(朴鐘圭)경호실장이 우리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싸움을 말린다는 게 그만 판이 더 크게 벌어져 버렸다.

둘 만의 싸움에 또 한 사람이 끼어 들었으니 밖에서 들을 땐 마치 패싸움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들렸으리라. 급기야 옆방에서 朴대통령에게 경제현안을 보고중이던 장기영(張基榮)경제기획원 장관까지 달려오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張장관은 당황한 표정으로 '각하 방에까지 싸움 소리가 들릴 정도' 라고 말해 가까스로 육탄전(□)만은 피할 수 있었다.

잠시후 자초지종을 보고 받은듯 朴대통령이 우리 두 사람을 불러 놓고는 위스키 한 잔씩을 따라 주었다.

"일하다 보면 싸울 수도 있지. 자, 한 잔 쭉 마시고 잊어버려!" 하며 빙긋이 웃었다. 역시 큰 그릇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해프닝은 나중에 朴실장이 기자들과 술자리에서 얘기하는 바람에 밖에도 알려지게 됐다. 그바람에 '대통령 면전에서 이동원-이후락이 두들겨 패고 싸웠다더라' 는 얘기가 한 때 장안의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한편 朴대통령은 뤼프케 대통령, 에르하르트 총리, 브란트(전 총리)베를린 시장 등 독일 지도자들을 만났는데 특히 朴대통령은 브란트와의 만남에서 통일문제에 상당한 시사를 받았다.

후일 동방정책을 추진해 통일의 초석을 놓은 브란트는 朴대통령 초청 만찬에서 "통일 보다는 먼저 분단 현실을 인정하면서 문화.경제교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 조언했다.

朴대통령은 만찬장을 나서면서 "이 사람들 도대체 통일할 생각은 있는 거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왜 생각이 없겠느냐. 다만 통일이 될 때까지 차분히 준비하고 기다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 이라고 대답했다.

朴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 우리도 자나깨나 통일을 외쳐대지만 빨갱이들이 버티고 있으니 불가능한 일이야. 우리가 잘 살게 되면 그때 기회가 오지 않겠어□" 하며 브란트의 말을 곰곰 되씹는 표정이었다.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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