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32.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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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⑩

태호가 포시에트 내왕을 굳힌 이면에도 중국과 러시아간의 국경선 경계망이 한국에서 예상했었던 것에 비하면 전혀 달랐던 데 있었다. 내왕길 어디에서도 무장한 경비병을 만날 수 없었고, 국경선을 명확하게 긋는 삼엄한 시설물이나 표지판을 본 적도 없었다.

한국의 동해와 서해, 그리고 휴전선을 방문했을 때, 보고 느꼈던 싸늘하고 스산한 경계선의 풍경과 삼엄하기 짝이없는 대치상황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허리띠 없는 바지를 입은 것처럼 느슨하고 허술했다.

더욱이나 국경선을 같이 넘나들었던 밀매상들의 거동 어디에도 긴장감을 찾기 어려웠다.

다만 창링즈 근처 마을 조선족들의 훈수를 받아 강도들의 위협만 따돌릴 수 있다면, 그 잠행 루트에서 적지않은 이득을 챙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태호의 얘기를 듣고 있던 손씨가 맞장구를 쳤다.

"그 사람들이 진품 사향을 분별하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가르쳐 주었다면, 태호한테 호감을 가진 것이 틀림 없구만. 그러나 그 사람들이 속으로 바라는 게 없지 않구서야 대접이 그토록 융숭할 수는 없겠지□"

"내가 잊지않고 찾아가서 인사를 드린 것이 그토록 고마웠던가 봅니다. 내가 월경할 때마다 찾아가서 예의만 차린다면, 나한테 더 바라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수고비 명목으로 얼마를 건넸지만, 한사코 사양했었어요. 그러나 나도 막무가내로 버텨서 결국은 받아 넣도록 만들었어요. "

"그러나 장차의 일을 장담하기는 아직 이르지. 지금은 잠행 루트가 안전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주 이용하다 보면, 어떤 변수가 도사리고 있을지, 태호 혼자의 안목으로는 그런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어. 코웃음 치지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관으로 해서 정식으로 드나들 방도를 찾든지 아니면, 김승욱씨를 대신 드나들게 주선하는 것이 안전할 거야.

누군가가 태호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낚싯밥을 던질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거야. "

"모험이 뭔데요? 죽을지도 모르고 날벼락을 맞을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는 게 모험 아닙니까. 형님 말대로 어떤 변수가 기다리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에는 나도 동감입니다. 그러나 밥상에 된장찌개 올려지기를 바라면서 구데기가 무서워 장은 담그지 못하겠다는 것이 바로 모순이란 것입니다. 승욱씨 대신 보내는 것도 그래요. 그게 끼니 때마다 남의 집 된장 얻어먹자는 염치 아니겠습니까. 날벼락 맞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엄청난 이득이 보장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

"난 무슨 요술을 보는 것 같어. 한 번 행보에 이천불 이득을 본다는 게 말이나 돼?"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위험수당이 붙어서 그런거예요. "

"그렇다면 다음에 나도 따라가□"

"형님과 동행하면 위험부담은 배로 불어나게 돼요. 이번엔 무사히 다녀오긴 했지만, 다시가면 솔직히 말해서 또 어던 변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때 형님이 지난번처럼 엉뚱하게 웩웩 소리나 질러대고, 주책없이 들고 뛰기라도 한다면 또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도 가고 싶다면 내가 다녀올 때까지 창링즈 조선족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

"들고 뛰다니 뛴 건 박봉환이었지 내가 언제 뛰었다고 멀쩡한 사람 덮어씌우나□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기만 하면, 내가 중국까지 와서 무슨 역할을 했느냐는 의문이 남잖여. "

"지난 번에 그런 봉변을 당하고도 연길까지 다시 온 것만도 보통 배짱이 아닌 거예요. 형님이 다부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연길 근처에는 두 번 다시 얼씬도 않았을 겁니다. "

"날 칭찬하는 줄 알았더니, 가만 듣고 보니 결국은 자기 배짱 좋다는 자랑이구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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