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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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35. 최규하씨 '새옹지마'

관료경험이 없던 나는 외무장관이 된 후 장관 특별보좌관인 최규하(崔圭夏)대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런 관계로 나는 崔대사의 영국행이 좌절되자 그를 호주 대사로 밀었다.

그런데 이주일(李周一.전 최고회의 부의장)감사원장이 장관실까지 달려와 막았다. 그는 당시 이동환(李東煥.전 내무차관) 호주대사와 막역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崔대사와 의논끝에 말레이시아로 밀어 붙이기로 했다. 그곳에는 5.16당시 논산 훈련소장을 지냈던 최홍희(崔泓熙)장군이 초대 대사로 있었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그 친구 그냥 불러 들이면 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전부터 잘 알지만 성깔있는 친구니 웬만하면 그냥 놔 두지" 하며 만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불러들인 뒤 좋은 곳으로 보내주겠다' 고 설득했다. 대통령은 일단 승락을 하면서도 "분명히 본인 양해하에 그렇게 하라고 했어" 하며 거듭 다짐을 받았다.

나는 崔대사에게 자필 편지로 양해를 구했지만 그는 심사가 뒤틀렸던지 그후 캐나다로 건너 가 버렸다. 그는 그곳에서 반체제 운동을 전개했고 66년에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 반한활동의 선봉에 서고 말았다.

'인간만사 새옹지마' (塞翁之馬)라고 했는데 최규하 대사가 꼭 그랬었다. 영국.호주가 잇따라 좌절된 뒤 탐탁치 않는 심정으로 말레이시아에 부임했던 그는 2년 후인 66년 2월 朴대통령의 동남아 순방때 눈에 띈 것이 계기가 되어 그후 외무장관-국무총리-대통령으로 승승장구했으니 말이다.

한편 백선엽(白善燁) 프랑스 대사가 캐나다로 일찌감치 정리되자 나는 후임에 김활란(金活蘭.전 이대총장)박사를 추천했다.

朴대통령은 "왜 프랑스에 '치마' 를 내 보내려고 해□" 하며 마땅찮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드골 대통령이 '치마' 를, 그것도 교양있는 '치마' 를 좋아한답디다" 고 했더니 朴대통령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사실상의 내락이었다.

金박사는 그러나 자신의 건강 때문에 결국 외무부 순회대사에 그치고 말았다. 어쨌거나 金박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대사라는 기록을 남겼다.

결국 프랑스 대사에는 베테랑 이수영(李壽榮)씨가 임명됐지만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朴대통령은 '이수영' 이란 말을 듣는 순간 "그 친구는 무조건 안돼!"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연인즉, 李대사가 64년 5월부터 잠시 공보부장관으로 일할 때 발생한 언론파동 때문이었다.

당시 공화당이 신문윤리위원회 권한을 확대해 언론을 규제하려 하자 전 언론이 일어나 반대를 했는데 이 때 李대사가 언론편에 기울어 朴대통령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외무부는 64년 10월 6일 이같은 내용의 공관장 인사내용을 발표했다. 김정렬(金貞烈.전 국방장관)주미대사가 김현철(金顯哲) 전 내각수반으로 바뀌는 등 군출신 대사들이 대거 교체된 반면 신규임용은 태국대사 장성환(張盛煥.전 공군참모총장)씨등 소수에 불과했다. 군부쪽 불만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0월말 張대사 태국부임 송별회가 신당동 요정에서 열렸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더니 그곳에서 민기식(閔機植)육참총장과 조우하게 됐다. 술이 몇차례 돌기도 전인데 閔장군이 느닷없이 정종 한 잔을 가득 채우더니 내게 술 잔을 집어 던지며 욕을 퍼부어 댔다.

"야, 외무부 하고 국방부하고 정말 한번 붙어 볼래□ 너희들 총 있냐□ 순 입만 가지고 하지□ 우리는 총 있다!" 나도 지지 않았다.

"군인도 능력이 있으면 쓰는 거요. 여기 있는 張장군도 태국대사로 가고 독일의 최덕신(崔德新)대사도 군 출신 아니요□" 그러자 극도로 흥분한 閔총장은 "뭐야□" 하며 소리를 지르더니 엉겁결에 허리에 차고있던 권총을 더듬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張대사등 다른 장성들이 그를 말리느라 술자리는 순간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싸우다 정든다' 고 그 후 閔총장과 나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다.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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