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22.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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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제11장 조우

그날 밤 한철규는 방극섭을 마을 초입에 있는 선술집으로 유인하였다. 떠난다는 승희를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극섭은 한동안 말문이 막힐 정도로 놀랐다.

"이게 뭔 소리여? 그게 참말이어라?" "농담 아니니깐 호젓한 장소로 불러낸 것 아닙니까. " 방극섭은 억장이라도 무너지는 듯 가슴에다 손을 얹고 한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당가. 승희씨가 미쳤지라. 온전한 정신 아닌 게비여. 말은 하라고 있는 거지만 그라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따로 있는 법인디. 지 앞가림은 한다는 승희씨 입에서 가슴시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어라. 안돼야, 시상없어도 그건 안돼야. 형님도 답답혀요. 으쩌다가 승희씨한테 그런 요상헌 말까지 듣게 되었뿌렀소이?"

"내가 답답한 위인이어서가 아니라, 나처럼 느슨하지 않고 촘촘하게 살고 싶단 얘기예요. 떠돌이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란 한자리에 붙박혀서 오래 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

"촘촘하게 살다니? 그게 뭔 소리여? 독수공방으로 두었던 탓이 아닌지 모르겠어라. 그래서 내가 뭐랍디여. 후딱 결혼식 해치웠으면 이런 꼴은 안봐도 될 일 아니었어라. "

"결혼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인생을 촘촘하게 살지 않으면, 살아있을 명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는 한 둘이 아닙니다. 장삿속이야 어떻든 낯선 고장으로 가 낯선 사람들과 만나지 않으면, 자신의 삶과 세상을 연결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사람들은 떠나보내는 게 옳습니다. "

"난 뭔 소린지 모르겠소. 대가리에 검은 털 난 짐승치고 낯선 고장 구경하기 싫다는 소리하는 건 못들어 봤구만이라. 그러나 고흥에서 살아도 전라도 땅 골골샅샅이 장터란 장터는 메주 밟듯하면서 만나는 게 낯선 사람들 아니것소. 시골서는 낯선 사람 만나도 사람 취급 못하겠다는 소린지 모르것소. 꼭 중국사람이나 러샤 사람 만나야 사람 만난 기분 나것다 그 말이요? 떠나기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늙거나 고단하게 되면 안태고향으로 안 돌아오는 놈도 없어라. 장다리에 힘 빠지고 손등에 검버섯 피고 눈에 진물날 때 쯤이면 객지바람 쐬기가 풀쐐기에 쏘인 것처럼 독하단 것인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린 게 형님이 다잡아서 엉뚱한 맘 품지 않도록 잡도리하시요이. 되돌아올 곳을 어째 떠나지 못해서 저 발광들인지 알다가도 모르것소이. "

"내가 나선다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란 걸 진작부터 알고 있어요. " "그렇다면, 날 뭐할라꼬 불러냈어라?"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으란 얘기를 해주려는 것입니다. 막상 떠나게 되면 동기간으로 생각하고 있던 형식이도 상처를 받을 것이니까…. "

"형님 말씀 들어보니 대수롭잖게 넘길 일은 아니것소이. 나가 승희씨를 다잡고 맘을 돌려 볼랍니다. 발바닥이 근질거려서 못 견디겠다면, 서울 가락시장 드나드는 일을 승희씨한테 맡기면 되지 않것소. 이문도 그렇소. 서울 한 행배하고 나면 백만원 이상 마진남는 장사가 어디 있다고 승희씨가 그런 고달을 빼는지 알 수 없네요이?"

"이익이 남지 않아 결심한 것은 아닐 겁니다. 우선 나에게서 떠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태호나 봉환이와 어울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걸 가로막게 되면 헤어지려는 마당에 오히려 앙금만 크게 남길 뿐입니다. 난 그렇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요. 떠나기를 결심한 사람 잡지않는 게 내 특기예요. "

방극섭은 탁자 위에 놓인 소줏병을 들어서 목을 뒤로 젖히더니, 그대로 병나팔을 불고 있었다. 그 날 두사람이 안주도 없이 마신 깡술은 모두 여섯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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