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위협받는 통신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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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검찰.경찰.국가정보원 등 수사.정보기관에 의한 국민의 통신비밀 제한조치가 여전히 우려할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보통신부의 국회 제출자료에 따르면 국가기관의 올 상반기 전화.휴대폰 감청이 2천건을 넘었다.

이런 감청 외에도 통화내역 조회건수가 2배 이상 늘고, PC통신 등 사이버영역에서도 수사기관에 의한 접속기록 조회와 E메일 감청이 이뤄지고 있음이 알려진 터라 사생활과 통신의 자유가 갈수록 위협받고 있음을 실감케 된다.

지난해 국정감사를 통해 전화 감청 남용과 도청 의혹이 부각된 후 그 피해의식은 노이로제 수준에 달해 있다.

감청 대상자가 정.관.재계 인사 1만명에 이른다는 말이 나돌고, 대검 공안부장조차 감청 대비를 했을 정도이니 누군들 감청과 도청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물론 국가안보나 범죄수사를 위해 통신비밀의 제한이 불가피할 때도 있다.

문제는 국가기관들이 그것을 법대로 시행하지 않는 점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은 수사목적의 경우 감청은 다른 방법으론 범죄를 저지하거나 범인의 체포 또는 증거수집이 어려운 때에 한하고 소명자료 첨부 등 엄격한 신청요건을 정해놓고 있다.

그러나 수사기관은 수사 편의에 젖어 마구잡이로 감청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영장 없는 긴급감청을 했다가 법규정대로 기한 내에 영장을 제출하지 못해 중지된 예가 전체 1백50건 중 47건이나 된다는 정통부 자료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또 전기통신사업법에는 통화내역 조회 때 통신업체에 서면요청을 하도록 돼있으나 상당수가 구두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통신비밀이 얼마나 허약하게 무너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불법 도청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같은 상황을 개선하려면 우선 법부터 개정해야 한다.

사실상 절도와 폭력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범죄를 망라하고 있는 감청대상을 중대범죄로 축소하고, 48시간으로 돼있는 긴급감청 허용시간을 줄이는 등 요건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국의 각성이다.

국가기관이 함부로 남의 전화를 엿듣고 통신내역을 들춰보더라도 이를 감시하고 통제할 현실적인 수단이 국민에게 없기 때문이다.

인권을 중요 국정목표로 삼은 정부답게 국민 기본권 보호라는 국가권력의 본질을 재인식하고 실천의지를 보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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