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책넘나들기] '미국의 문화, 미국의 입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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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미국의 문화, 미국의 입맛 (American Culture, American Tastes) - 마이클 캐먼 지음(앨프리드 A 노프 출간)

마이클 캐먼은 1973년에 '모순 속의 인간들' 로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현대문화사의 권위자다.

'미국의 문화, 미국의 입맛' 은 세기말을 맞아 그가 20세기 미국문화사를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파퓰러 컬처' 와 '매스 컬처' 의 개념구분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는 둘 다 '대중문화' 로 번역되는 말이다.

사실 미국에서도 둘 사이의 구분은 모호하다.

그러나 캐먼은 20세기 중엽까지 서민생활의 분위기를 감싸 주던 파퓰러 컬처와 그 이후 상업적 동력에 의해 문화의 저변을 석권한 매스 컬처를 구분하는 것을 문화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필수적 관점으로 제시한다.

파퓰러 컬처와 매스 컬처를 구분하는 이 관점이 없기 때문에 종래의 대중문화론이 현상적 특성을 마치 불변의 본질처럼 착각하는 몰 (沒) 역사성에 빠지고 대중문화의 장래에 대한 전망을 내놓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캐먼은 비판한다.

매스 컬처가 파퓰러 컬처를 잠식하는 현상은 세기초부터 나타났으며 50년대 이후 매스 컬처의 문화시장이 파퓰러 컬처를 완전히 덮어씌우게 되었다는 것이 캐먼이 짚어내는 20세기 문화사의 뼈대다.

파퓰러 컬처는 현장성이 있는 문화였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절대적 벽이 없는 문화였다.

마을의 축제와 아마추어 스포츠를 대표적인 예로 꼽는다.

이런 문화에는 놀고 뛰는 적극적 참여와 구경하는 소극적 참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지방극단이나 악단은 지역민들과의 교감 (交感) 속에 그들의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심지어 지방신문까지도 지역의 문화현상 속에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매스 컬처는 대규모 생산자와 추상화된 소비자를 격리시킨다.

소비자들은 거주하는 지역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주어지는 문화프로그램을 모두 똑같은 자세로 구경하는 소극적 관객의 입장이 된다.

소비자의 욕구는 통계수치로서만 생산자에게 전달된다.

생산자는 '가장 많은 소비자' 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만 상품을 기획한다.

골목골목의 구멍가게들을 밀어내고 슈퍼마켓을 비롯한 대형 유통기구들이 자리잡은 것도 매스 컬처의 득세와 궤를 같이한 일이다.

품질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으니까 고객들은 슈퍼마켓으로 옮겨간다.

마찬가지로 매스 컬처는 '세계적 수준' 의 문화상품을 '동네 수준' 의 구경거리보다 더 싼 값으로 제공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유통 덕분이다.

문화소비자들은 이 선택을 통해 능동성을 포기하는 대신 편의성을 보장받는다.

다수의 취향에 자기 욕구를 맞출 수만 있다면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여간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대중문화' 라 하는 것은 캐먼이 말하는 '매스 컬처' 와 똑같지는 않지만 대략 비슷한 개념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부각된 시점이 미국의 매스 컬처를 본격적으로 수입하는 단계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급문화' 와 대비되는 우리 '대중문화' 의 통념은 캐먼의 '매스 컬

처' 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는 고급문화라도 대량생산과 대량유통으로 상품화될 경우 매스 컬처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 고급문화는 대형화된 문화시장에 편입되지 않은 단계라 할 수 있다.

수십년간 미국으로부터 대중문화를 수입해 온 데 이어 일본과의 문화개방으로 이제 일본 대중문화가 대규모로 수입될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색' 이 우리 문화를 오염시킬까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캐먼의 책을 보면 매스 컬처를 수입함에 있어서 원산지의 민족적 색

채가 묻어들어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미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매스 컬처는 상업성의 힘으로 전통문화를 변형시키는 것이 본색이다.

매스 컬처의 파괴력과 전염성을 통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은 자본의 힘이지 미국이나 일본의 민족적 전통이 아니다.

김기협 문화전문위원.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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