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로씨 석방' 은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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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재일 한국인 무기수 권희로씨가 31년만에 석방되기까지에는 각계 각층의 끊임없는 구명 운동이 있었다.

가장 오랜동안 매달린 사람은 서울 미아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며 '권희로 석방후원회' 회장으로 활동중인 이재현 (李在鉉.52) 씨.

그는 權씨가 체포된지 2년 뒤인 70년 權씨의 석방을 위해 광주에서 백방으로 뛰고 있던 조중태 (前 전남매일신문 기자.94년 작고) 씨를 만나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동안 3백통의 편지를 權씨에게 보내고 2백통의 답장을 받았으며 모두 8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權씨를 면회했다.

또 權씨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3만명의 서명서를 받기도 했다.

여기에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 김영삼 (金泳三) 전 대통령, 김수환 (金壽煥) 추기경 등이 포함됐었다.

자비사 박삼중스님은 80년대 후반부터 이 일에 뛰어들었다.

權씨가 삼중스님에게 "나라가 있어야 민족이 영원하다는 것을 이국땅 형무소에서 절실히 느꼈다" 는 편지를 보내면서부터다.

朴스님은 90년에는 후원회장 李씨와 함께 10만명 서명을 받아 일본 규슈지방갱생보호회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93년에는 1만3천여명의 서명서를 다시 받아 일본 법무성에 석방요청서를 냈다.

일본 법무성 고위층과 줄이 닿는 정해창 (丁海昌) 전 법무부장관이은 줄기차게 물밑작업을 벌였다.

丁 전 장관은 朴스님의 특별면회를 주선했고 일본 법무성은 丁 전장관을 신뢰, 權씨의 행형성적과 權씨 석방과 관련된 움직임을 수시로 제공했다고 한다.

金대통령은 사건 발생 직후인 68년 4월 한승헌 (韓勝憲.감사원장).문인구 (文仁龜) 변호사 등에게 權씨 후원을 독려, 일본에 가 면회하게했다.

지난해 10월 일본방문때에는 權씨의 석방을 일본측에 요청하기도 했다.

95년에는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대표 이기우 신부)가 權씨 구명 서명운동에 착수, 김수환 추기경 등 1만2천여명의 서명을 받아 주한 일본대사관.일본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등에 전달했다.

당시 정평위 대표였던 장덕필 (張德弼) 신부 (현 가톨릭중앙의료원장) 는 "權씨는 한국 국민의 민족적 자존심과 인류의 평등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 사람이어서 구명에 나섰다" 고 회고했다.

한승헌감사원장과 문인구변호사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권희로 사건' 이 발생한 지 한달보름 뒤인 68년 4월 9일 시즈오카 형무소에서 權씨를 면담, 지원했다.

이들은 權씨의 일본인 변호사들과도 공조했다.

배명인 (裵命仁) 전 법무장관과 구상 (具常) 시인 등도 뒤에서 權씨 석방을 도운 사람들. 이들은 박삼중스님이 국내 사형수들의 교화활동과 구명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알게 된 뒤 김희로 석방을 지원해왔다.

裵씨등은 權씨 석방에 도움이 될 만한 국내외 인사를 삼중스님에게 소개해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사 한진흥업 한갑진 (韓甲振) 대표는 92년 權씨 사건을 '金의 전쟁' 이라는 이름오로 영화화 하는 등 후원했다.

도쿄〓강진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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