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어머니의 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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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울 남산 제3호터널 가까이 남산으로 향한 작은 길목엔 '초전박물관 입구' 라 쓰인 팻말이 서 있다.

팻말을 따라 1백m쯤 가다보면 섬유박물관이라는 부제를 단 박물관이 나타난다.

올해 봄 문을 연 이곳은 쓰고 남은 자투리 천을 이리저리 모양을 살려 생활용품을 만든 퀼트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데 하나같이 색채배합이며 기하학적인 배치가 뛰어나다.

어느 것 하나 탄성을 자아내게 하지 않는 작품이 없지만 특히 나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입구 쪽에 걸린 침대보였다.

20세기 초반 미국 여성이 만들었다는 이 침대보는 여러 개의 원이 연결된 '웨딩링' 이라는 독특한 모티브가 전체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원 하나마다 10개는 족히 넘는 작은 천 조각들이 하얀 바탕 천 위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도 무늬나 색채가 같은 것은 신기하게도 단 하나도 없었다.

그 까닭을 궁금해하자 김순희 초전박물관장은 "결혼하는 딸에게 어머니가 만들어준 침대보" 라면서 "작은 천 조각들은 그 딸아이가 태어나면서 그 때까지 입고 자랐던 옷들로 이어만든 것" 이라고 들려줬다.

작아졌거나 헤진 옷들을 버리지 않고 꼬박꼬박 모아둔 정성도 놀랍지만 한 조각 한 조각을 이어붙이며 그 옷가지마다 들어 있을 추억을 희미해진 기억의 저편에서 퍼올렸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새 옷을 사입혔을 때 기뻐하던 딸, 넘어져 구멍이 난 옷을 입고 울면서 들어오던 딸, 부쩍부쩍 자라는 딸에게 매번 새옷을 사줄 형편이 못돼 작아진 옷을 입히면 소매길이를 잡아 늘리느라 낑낑대던 딸…. 한 땀 한 땀 조각을 이어가던 어머니의 뇌리에 지나간 생활사가 교차되며 때론 행복한 미소를, 때론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을지 모른다.

아마도 신혼 첫날 밤, 어머니가 마련해준 이 침대보를 덮고 자려던 딸은 이내 그 조각들이 자신의 때묻은 옷가지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을 절감하며 미래에 누군가의 어머니가 될 자신에 대한 다짐과 각오를 했을 것이다.

31년만에 감옥에서 풀려나 내일 (7일) 조국을 찾는 일본의 최장기 무기수 재일교포 김희로, 아니 권희로씨가 받은 어머니의 선물도 심금을 울린다.

68년 일본 시즈오카 (靜岡) 현 시미즈 (淸水) 시 클럽밍크스에서 야쿠자가 빌려쓴 돈을 갚으라고 협박하며 "조센징, 더러운 돼지새끼" 라고 욕설을 퍼붓는 데 격분, 이들을 엽총으로 살해한 후 인근 후지미야 여관 숙박객을 인질로 잡고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시정' 을 외치다가 붙잡혔던 권희로씨.

재일교포들의 일본 사회에 대한 분노의 일단을 만천하에 드러냈던 그가 71년만에 처음으로 고국 땅을 밟으며 어머니 박득숙씨가 생전에 지어놓았던 모시 옷에 쪽빛 마고자 차림을 하고 온다고 뉴스는 전한다.

그의 어머니는 민족차별의 응어리를 안은 채 긴 세월 차디찬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들의 석방을 염원하며 언젠가 출소하게 되면 입히겠다며 스무벌 가량의 한복을 지었다고 한다.

사건 당시 후지미야 여관에서 아들에게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말고 깨끗이 자결하라" 며 흰색 한복을 건네기도 했던 그 어머니였다.

아들에게 죽음과 삶의 옷을 선물한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지어준 옷을 입으며 아들은 어머니의 꿈과 희망, 올곧은 삶에 대한 열정을 피부로 느끼리라. 나는 이런 어머니들이 존경스러웠고 동시에 그런 어머니가 되지 못한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들에겐 어린 자녀가 갖고 싶어하는 것을 사주는 것을 가장 좋은 선물로 여겨왔던 것 같다.

또 그것으로 자신의 어머니 역할 수행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아왔던 것 같다.

생활이 넉넉한 이들은 자녀가 원하는 것을 사주는 것으로 쉽게 스스로에게 만족해 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자녀가 원하는 것을 사주지 못해 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못한다는 자책으로 가슴을 찢었던 것은 아닌지. 또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식들에게 대접받는 것으로 어머니의 역할을 규정짓고 그것으로 효와 불효를 판단하게 되지는 않는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 라고 한다.

지금이라도 훗날 장성한 자녀에게 소중한 인생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어머니만이 줄 수 있는 선물' 한가지쯤 마련해보자. 그래서 우리의 아들 혹은 딸이 인생의 전환기에 서 있을 때 감춰두었던 '어머니의 선물' 을 살며시 건네주자. 그들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홍은희 생활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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