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 희로애락을 담아 40년을 졸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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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쓸쓸히 혼자 앉아 술 한잔으로 외로움을 달래는 중년의 신사,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스트레스를 푸는 직장인들, 오랜만에 친구들과 한자리에 모여 회포를 푸는 청년들…. 길이 60m, 폭 2m 내외의 골목 안에 선술집을 겸한 19곳의 오뎅 전문점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즈오카 아오바요코초의 밤 풍경은 고단하지만 한줄기 희망으로 살아가는 서민들의 일상이다. 가게 밖으로 희미하게 퍼져 나오는 침침한 조명 아래 5평 남짓한 공간에서 어깨를 맞대고 앉아 오뎅과 청주 한 잔으로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면 이방인들도, 관광객도 어느새 친구가 된다. 시즈오카 시민들의 사랑방이자 일본인들의 진솔한 모습을 만나고 느낄 수 있는 이 골목을 사람들은 오뎅거리라 부른다.

피맛골을 닮은 오뎅거리
인사동 뒷골목이나 종로의 피맛골을 연상시키는 오뎅거리에 도착했다. 일본 서민의 음주문화와 분위기를 느껴 보고 싶다던 허영만 화백의 표정이 밝아졌다. 현청 직원도 허 화백의 반응에 고무되었는지 “오뎅 맛은 일본을 대표할 만큼 자신이 있다”며 호기롭게 안내한다. 실제로 아오바요코초의 전문점들은 규모는 작고 허름해 보이지만 평균 20~30년의 내력을 갖고 있어 일본 오뎅의 진수를 맛보기에 손색이 없다.

가게를 방문하니 무엇보다 검은색 국물이 눈길을 끈다. 규스지(牛すじ, 소의 힘줄)와 간장을 기본으로, 매일같이 졸아든 만큼의 국물을 채워 수십 년 동안 끓여온 덕분에 한약재와 같은 진한 색깔로 변했다고 한다. 국물의 역사가 곧 가게의 역사인 셈이다.
국물을 유심히 보던 허 화백이 “35년 역사의 가게를 방문해 영광”이라며 가벼운 농담을 건네자 사람 좋게 생긴 주인장이 “5년만 더 늘려 써달라”고 애교 섞인 응답을 한다.

다양한 종류와 모양의 오뎅이 국물 안에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다. 뭘 먹어야 좋을까…. 눈치 빠른 주인이 자신 있게 구로한펜을 추천한다. 구로한펜은 고등어, 전갱이, 멸치 등 등 푸른 생선의 뼈까지 모두 사용한 흑(黑)오뎅으로 오직 시즈오카에서만 맛볼 수 있다.

시즈오카 오뎅은 먹는 방법도 독특하다. 간장이 아닌 아오노리(あおのり)라는 파래김의 일종과 사바부시(さば節·말린 고등어 분말), 이와시부시(いわし節·마른 멸치 분말)를 섞은 다시코(だし粉)를 뿌려 먹는다. 이외에 특별히 매운 소스를 제공하는 가게도 있어 간장이 없는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국물은 의외로 따로 제공하지 않는다. 국물은 오직 오뎅에 간을 배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한다. 그래도 국물을 중시 여기는 한국 사람인지라 호기심에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하니 오뎅 맛부터 보란다.

일단 구로한펜은 폭신폭신한 진빵을 먹는 듯한 부드러운 질감이 일품이다. 생선살의 담백함과 뼈의 고소함이 적당히 균형감을 이뤄 질리지 않는 뒷맛이 인상적이다. 단단하지 않은 오뎅 입자들이 촉촉하게 국물을 머금고 있어 씹는 순간 과일의 과즙처럼 입 안에 퍼져 여운을 남긴다. 다양한 종류의 오뎅은 물론이고 무, 당근, 곤약, 오징어, 삶은 달걀, 내장 등 부재료를 골라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맛도 맛이지만 40년 졸인 국물 덕분에 모든 재료가 특별해 보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제야 주인의 권유가 납득이 가는 듯 입 안에 남은, 진하지만 단맛이 가득한 국물을 음미하는 허 화백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오뎅은 자고로 이런 품격이 있어야 한다며 한 수 알려주는 듯한 맛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일행의 반응이 궁금했던 현청 직원이 조심스럽게 평가를 부탁한다. 허 화백이 아무런 대답 없이 잔을 들어 건배를 외치고는 또다시 검은색 국물 안의 오뎅을 골라 잡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오뎅에 뜨거운 청주 한잔을 곁들이는 작은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 싶다는 뜻이리라.

시즈오카에선 아침식사로도 인기
엄밀히 말해 오뎅은 생선살을 으깨어 전분 등 양념을 섞어 굳히거나 튀긴 어묵들을 한데 모아 끓인 탕요리의 총칭이다. 흰살 생선이 90% 이상 함유된 가마보코(かまぼこ)를 한데 넣고 끓인 요리가 오뎅이라는 설도 있지만, 가마보코 역시 오뎅에 들어가는 어묵의 한 종류일 뿐이다.

일본 오뎅의 특징은 어묵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부재료도 그에 못지않다는 것이다. 두부, 무, 감자, 문어, 오징어, 곤약, 게, 새우, 조개, 닭 내장, 돼지 족, 각종 채소 등이 오뎅에서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부재료다. 시즈오카와 달리 대부분 지역에서는 꼬치는 사용하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국물보다 어묵 본연의 맛을 즐기는 경향이 강하다.

국물은 간장, 가쓰오부시, 다시마, 스지를 주재료로 하고 있어 멸치, 황태, 양파, 대파 등으로 맛을 낸 국물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느끼하거나 무거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술안주로 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시즈오카에서는 주먹밥과 함께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아침식사로도 각광받고 있다. 참고로 오뎅이란 단어는 무로마치(室町·1338~1573) 시대의 덴가쿠(田樂)라는 두부 요리에 정중한 표현을 뜻하는 접두어 ‘오お’를 붙여 탄생하였다고 한다.


*일본자치체국제화협회 클레어(Clair)와 한진관광의 후원으로 2년간 일본을 방문해 다양한 요리와 온천 문화, 자연을 경험하고 그 체험을 독자와 나눌 예정입니다.

이호준 ‘식객’ 취재팀장 만화 허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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