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책넘나들기]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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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 조너선 스펜스 著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주원준 옮김.이산출판사

15~16세기의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인들은 온 세상을 자기네 식으로 바꾸는 것을 큰 일거리로 삼았다.

그중에는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내며 노예와 보물을 찾아나서는 사람들도 있었고, 야만인을 문명으로 구원하는 것을 '백인의 짐' 으로 여긴 비교적 양심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선교사들은 상인이나 군인에 비하면 양심적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유일한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광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1583년 중국에 최초의 선교사로 들어간 마테오 리치 (중국명 利瑪竇 1552~1610) 는 중국문화를 최대한 이해하고 이에 스스로 적응하려는 '적응주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중국의 유교를 높이 평가하면서 자신이 가져온 기독교가 유교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유교가 제 구실을 잘 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얼마 전 번역출간된 '천주실의 (天主實義)' (서울대출판부) 는 이와 같은 보유론 (補儒論) 을 중국독자들에게 해설한 책이며 이를 비롯한 리치의 저서들은 조선에도 건너와 이익 (李瀷) , 정약용 (丁若鏞) 등 18세기 학자들에게서 서학 (西學) 의 움직임을 끌어내기도 했다.

유일신을 모시는 기독교는 이교 (異敎) 문화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이 많지 않다.

이에 비추어 리치의 적응주의는 이례적인 선교노선이었다.

실제로 리치가 죽은 후 이 타협적 노선은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킨다는 비판에 직면해 몇십년 후에는 교황청의 금지조치를 받게 된다.

리치가 중국인들을 개종시키기보다 오히려 자신이 중국문명에 개종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적응주의는 리치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예수회에서 당시 널리 채택하고 있던 노선이었다.

예수회는 16세기초의 종교개혁으로 세력이 꺾인 카톨릭교회의 중흥에 앞장선 단체였다.

따라서 예수회 선교사업의 목적은 개인의 구원보다 교회세력권의 확장을 위해 새로운 지역을 통째로 개종시키는 데 있었고, 이 목적을 위해 선교대상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포용하는 선교노선을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리치의 보유론 (補儒論) 은 적응주의노선 치고도 극단적인 포용력을 보인 경우였다.

이 포용력은 중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동서간의 본격적 문화교섭이 겨우 시작되는 단계에서 리치와 같이 특출한 이해심이 어떻게 빚어질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하나의 불가사의로 남아 있다.

이 문제에 특출한 해명을 제시한 것이 예일대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1983) 이다.

리치가 초기 저작 중 서양의 기억술을 소개한 '서국기법 (西國記法)' 에 사용한 소재 (素材) 를 통해 리치의 의식 밑바닥을 파고들어간 이 연구는 역사서술에 문학성을 접목시키는 스펜스의 탁월한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리치의 뛰어난 문화적 감수성을 그 출신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적 지적 배경에 연결시킨 스펜스의 관점은 16세기의 이탈리아와 중국 두 문화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섬세한 검토로 뒷받침된다.

교섭의 주체 양쪽을 모두 더욱 입체적인 모습으로 그려줄 수 있다는 '교섭사' 분야의 상승적 (上乘的) 경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김기협 문화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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